■선조宣祖 1편
■선조(宣祖) 1편
조선 14대 왕 선조(1552~1608년)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학문과 문화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라는 평가도 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도성을 버리고 자신의 안위에만 급급했던 비겁한 군주였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아들 광해군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전쟁 영웅인 이순신의 공을 시기하는 편협한 군주로 인식되기도 한다.
선조 시대는 사림파들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면서 붕당정치가 시작되던 때였다. 중심인물은 이황, 조식, 이이, 이준경, 유성룡, 정철, 윤두수, 이산해,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신흠, 이수광 등으로 그 뿌리는 사림파였다. 이처럼 쟁쟁한 학자들이 동시에 배출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선조 시대는 학문의 진흥과 사림파 학자들의 정치 참여 기반을 조성했다는 긍정적인 요소도 엿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라는 위기에서 보여준 무능함,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전개된 당쟁의 시작, 1589년의 기축옥사와 같은 대형 정치 참극의 방관자라는 등 선조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요소가 많다.
선조는 조선 왕실에서 방계(傍系) 출신으로 최초로 왕이 된 인물이다. 방계(傍系)출신 그것도 아홉 번째 서자의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나 왕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방계(傍系) 승통은 선조(宣祖)의 가장 큰 컴플렉스가 되기도 했다. 선조 이균(李鈞)은 중종의 손자로, 아버지 덕흥대원군은 후궁인 창빈 안씨의 소생이고 인종과 명종은 이복형제 사이였다. 선조 이전까지 왕자의 난이나 계유정난, 중종반정과 같은 정변(政變)이 있었지만, 그래도 왕실의 적통에서 왕위가 계승됐다. 그럼 왜 왕실의 방계에서 왕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까?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가 요절(夭折)한 후 적통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적통은 정비나 계비 소생 왕자를 말한다.
그나마 명종이 생전에 미리 후계자를 지목해 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중종과 창빈 안씨 소생인 덕흥군의 세 아들 중 하원군과 하릉군을 제치고 세 번째 하성군을 지명했다. 어차피 후궁 출신 왕자 중에서 후계자를 정해야 함으로 서열보다는 왕자로서의 자질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