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의 여인들 - 의인왕후 2편
■ 선조의 여인들 - 의인왕후 2편
인빈 김씨는 선조의 세 번 째 후궁으로 선조가 매우 총애하고 있었다. 인빈 김씨는 자식 욕심도 대단하여 왕자를 4명이나 생산하였고, 그런 만큼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만들려고 하는 야심 또한 만만치 않았다. 물론 선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사람은 광해군이지만, 결론적으로 나중에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된 인물이 바로 그녀의 아들인 정원군이 낳은 손자 능양군이다. 아들을 왕으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손자를 왕으로 만든 셈이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을 가게 되는데, 본부인인 의인왕후 박씨가 아닌 공빈 김씨를 데리고 의주로 피난을 갔다. 의인왕후는 평양에서 먼저 함흥으로 가서 선조를 맞이하려고 했으나 평양의 군민(軍民)들에게 길이 가로막히는 일을 겪기도 하였다. 그 뒤 선조에 앞서 평양을 떠난 의인왕후는 평안도 강계로 피난을 갔으며, 한양이 수복되어 선조가 환도한 뒤에도 선조와 떨어져 황해도 해주(海州)에 머물렀다. 선조는 사간원이 잇따라 의인왕후의 환도(還都)를 간언해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의인왕후는 1595년(선조 28년) 겨울이 되어서야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선조는 인빈 김씨만 데리고 피난을 가고, 의인왕후는 선조와 떨어져 광해군과 함께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피난을 갔다. 그리고 일본군이 철수한 뒤에도 환도를 하지 못하다가 1599년(선조 32년) 음력 윤4월이 되어서야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연이은 전쟁과 피난으로 병세가 깊어져 이듬해인 1600년(선조 33년) 음력 6월 27일에 죽었다.
선조는 "(왕비는) 투기하는 마음, 의도적인 행동, 수식하는 말 같은 것은 마음에 두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권하여도 하지 않았으니 대개 그 천성이 이와 같았다. 인자하고 관후하며 유순하고 성실한 것이 모두 사실로 저 푸른 하늘에 맹세코 감히 한 글자도 과찬하지 않는다." 고 말하며 덕망 높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칭송하였다.
의인왕후는 죽은 뒤에 유릉(裕陵)에 매장되었다. 오늘날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 의인왕후의 묘역은 1630년(인조 8년)에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조성되었던 선조의 무덤인 목릉(穆陵)이 그곳 곁으로 이전되면서 목릉으로 합해져 불리게 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