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2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2편
조선시대 왕비는 입궁하면 대략 1천 결 정도의 왕실토지에 대한 수세권(收稅權)을 얻는데, 이는 매년 1천 가마 이상의 수입을 의미한다. 그녀의 재산은 친정인 명례동에 마련한 서제소(書題所)의 차지(次知) 오윤남이 관리했다. 1603년(선조 36년) 정명공주가 태어나면서 배정된 850결,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배정된 노비 450명, 전답 300여 결까지 명례본궁에서 관리했으며, 선조에 의해 영창대군이 제안대군의 후계자로 정해지면서 그가 축적했던 수천 결의 땅과 수백여 명의 노비까지 송두리째 떠안음으로써 인목왕후의 친정아버지인 김제남은 큰 재력을 쥐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위정자들이 권력을 유지하려면 많은 정치자금이 소요되고, 그 과정에서 불법적인 정경유착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정권을 탈취하는 데도 그만한 재력이 필요할 것이다. 바로 그 민감한 점을 간과함으로써 인목왕후나 그 아버지 김제남은 재앙을 자초한 면이 있다. 인목왕후는 본가의 세력으로 보나 개인의 성품으로 보나 특출한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위험한 시기에 지나치게 재산을 불림으로써 광해군과 정권을 이끌고 있던 대북파들의 눈총을 받았다. 그 때문에 김제남에게 위험을 경고한 사람도 있었지만, 김제남은 광해군의 불안감을 감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재산을 불림으로써 화를 자초하게 된 셈이다.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가장 난감해 진 사람은 바로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발발 직후 국가 비상사태에서 세자 자리에 올랐다. 그는 어머니가 후궁이었기에 태생적으로 왕위 계승에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유교 윤리가 지배하고 있던 조선 사회에서 집안의 대는 반드시 본부인이 낳은 아들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존재했는데, 적장자가 탄생해 버렸으니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비록 전쟁 중 분조(分朝)를 잘 이끈 공이 있고, 오랜 기간 세자 자리에 있었다고는 하나, 광해군의 처지가 불안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유영경 등 소북파(小北派)는 당시 세자인 광해군이 서자(庶子)이며 둘째 아들이라 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고자 하였고, 대북파(大北派)는 광해군을 지지하였다. 그 때부터 조정 신료들은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자고 주장하는 소북파와 세자인 광해군을 추종하는 대북파로 갈라져 당쟁이 확대되면서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그 무렵 갑작스레 악화된 선조의 건강이 대세를 갈라놓았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