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3편
■ 선조의 여인들 - 인목왕후 3편
1607년 10월부터 병석에 누운 선조는 만일에 대비하여 광해군에게 전위하겠다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어린 영창대군으로는 전란(戰亂)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재기를 도모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영의정 유영경과 소북 대신들은 광해군이나 대북파들에게는 그 내용을 비밀에 부쳤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광해군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이듬해인 1608년 1월, 죽음을 예감한 선조는 중신들을 모아놓고 광해군에게 선위(禪位)교서를 내렸다. 그런데 또 다시 유영경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파의 영수 정인홍에게 발각되었다.
그리하여 유영경의 죄상을 취조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선조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다급해진 유영경은 영창대군으로 후사를 삼고 수렴청정을 하라고 인목왕후를 부추겼다. 그러나 선조의 유명(遺命)을 중시한 인목대비는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으로 하여금 보위를 잇게 했다. 그리하여 광해군은 16년 동안의 위태로웠던 세자 자리에서 벗어나 드디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가 정권을 손에 넣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무너진 국가기반을 재건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면서 왕권 회복에 박차를 가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자신의 책봉에 반대하고 세손의 원손책봉과 혼인을 지연시켰으며, 선조의 전위(傳位)를 방해한 유영경을 처단하고 소북파 인사들을 대거 축출했다. 영창대군의 후원자였던 유영경이 죽음으로써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입지는 크게 불안해졌다. 또 광해군의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은 임해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냈고, 마침내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 현감 이직이 수문장 이정표에게 명하여 임해군을 죽이자,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들의 불안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에는 ‘김직재의 옥사’가 일어났다. 당시 조정에서 쫓겨난 서인과 소북파는 영창대군이나 능창군을 옹립하기 위하여 은밀하게 명나라에 사람을 보내 세자책봉과정을 재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대북파는 그 정보를 반대파 말살의 계기로 삼고 역모를 조작하여 김직재, 김백함 부자를 비롯하여 100여 명의 소북파 인사들을 대거 숙청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613년(광해군 5년) 드디어 인목대비에게도 가혹한 시련이 다가왔다. 이른바 ‘칠서(七庶)의 옥(獄)’으로부터 비화된 ‘계축옥사(癸丑獄事)’의 서막이 올랐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