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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5일 월요일

조선 개국의 원동력, 성리학 1편

■ 조선 개국의 원동력, 성리학 1편

■ 조선 개국의 원동력, 성리학 1편

고려 말 수용된 성리학은 고려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개혁의 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아마 이러한 결과를 예견했더라면 당시 고려 지배층은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성리학은 당시 원나라에서 수용되었는데, 몇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고려의 학자나 문인들이 선진문물의 중심지인 원나라로 유학을 가기도 했다. 당시 원의 수도에는 성리학이 발달했던 남송 출신 성리학자들이 관리나 학자들로 많이 머물고 있었다. 이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성리학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충선왕은 아들인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듬해인 1314년 원나라 수도에 머물면서 학문기관인 만권당을 설치하고, 남송 출신의 뛰어난 성리학자와 고려 유학자들을 불러 들여 학문적 교류를 했다. 이를 통해 고려 지식인들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다.

마지막으로, 충선왕은 원의 황제에게 건의하여 1313년부터 원나라에 과거제가 시행되게 되었다. 당시 과거시험의 중요 과목은 성리학을 완성시킨 송나라 주희(남소의 유학자)가 주석을 단 논어(論語) · 맹자(孟子) · 중용(中庸) · 대학(大學) 등 네 가지 책이었다. 흔히 이를 사서집주(四書集註)라고 한다. 《사서집주(四書集註)》는 송 이후 중국인·한국인·일본인에게 가장 많이 읽혀진 고전에 속한다.

따라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주희의 주석서를 읽어야 하고, 고려의 수많은 지식인들은 출세를 위해 고려 보다 원나라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응시를 했고, 이를 통해 성리학은 자연스럽게 고려에 수용되기 시작했다.

- 2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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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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