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종의 여인들 공혜왕후 1편
■ 성종의 여인들 공혜왕후 1편
성종(成宗)은 이름 그대로 조선의 유교적 질서와 통치체계를 완성한 왕이었다. 성종은 학문이 매우 깊고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간, 조선역사상 성군(聖君)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성종은 열심히 일한 만큼 놀기도 좋아하여, 주연(酒宴)과 여색(女色)을 즐겼다. 그는 성품이 담대하고 비교적 키가 작았던 다른 왕들에 비해 기골이 장대하고 키가 컸다고 한다. (물론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165CM 내외?) 7년간의 수렴청정을 거치면서 임금이 되는 공부가 어느 정도 끝나자 성종은 사냥과 술, 여자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름 그대로 성(性)종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성종과 가까운 종실들이나 측근들을 대할 때면 반드시 작은 술잔치를 베풀어 기생과 음악이 따르게 했다. 그런 면에서 연산군은 아버지 성(性)종의 유전자를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은 아닐까. "연산군이 연락에 즐겨 빠진 것은 성종 때부터 귀와 눈에 배었으므로 그렇게 된 것이리라." 라고 《연려실기술》에 나올 정도였다.
성종은 3명의 왕후와 10명의 후궁을 두었고, 16명의 왕자와 12명의 공주와 옹주를 두었다.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넷째 딸로, 1467년 12세의 나이로 한살 연하의 잘산군(자산군)과 혼인했다. <세조실록> 1467년(세조13년) 1월12일 기록을 보면 『잘산군이 영의정 한명회의 딸을 영응대군 이염(李琰)의 집에서 친영(親迎)하였다』 고 적혀 있다. 물론 이때만 해도 자신이 왕비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유순한 성품에 효심도 깊어 시조부인 세조한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세조께서 우리 주상 전하의 배필을 가리실 때에 뜻에 맞을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왕후께서 덕용(德容)을 지녔음을 알고 불러 보고서 혼인을 정하셨다』 는 기록은 이를 증명해 준다. 2년 후 그녀에게는 큰 행운이 찾아왔다. 예종이 죽은 뒤,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에 이어 왕위 계승 서열 3위에 있던 남편 잘산군이 왕위에 올라 성종이 된 것이다. 성종은 일찍부터 왕의 재목으로 부족함이 없었으나, 실제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한명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셋째딸 장순왕후가 예종의 세자빈의 지위에서 사망한 만큼, 왕의 장인으로서의 권력을 맘껏 행사하지 못했던 한명회로서는 공혜왕후가 왕비가 됨으로써 그 한(恨)을 풀게 되었다. 천안군부인(天安郡夫人)으로 불리던 공혜왕후는 성종의 즉위와 동시에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녀의 품성에 대해서는 『명문가 출신이면서도 검소한 덕이 일찍부터 나타나고, 유순하고 고요한 성품을 타고났다』 고 <성종실록>은 전하고 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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