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종의 여인들-폐비 윤씨 3편
■ 성종의 여인들-폐비 윤씨 3편
그해 윤 10월 날씨가 차가워지고 윤씨의 거처에 도둑까지 들자, 폐비를 별궁으로 들여야 한다는 중신들의 의견이 비등했지만 성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왕비는 폐출되고 왕자 융은 외가인 강희맹의 집에 거처하면서 양육되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자신의 부인이요, 후일 왕위에 오를 원자의 어머니라 성종 역시 그녀가 개과천선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성종은 윤씨가 폐위된 후에도 언문(諺文)으로 편지를 써서 보내며 허물을 고치기를 바랬다. 그러나 성종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1482년(성종13년) 정월, 연산군이 일곱 살이 되자 조정에서는 세자 책봉 논의가 일어났다. 또한, 일부 조정 신료들에 의해 세자의 어머니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이어졌다. 즉, 조정에서 따로 거처할 곳을 마련해주고 생활비 일체를 관부에서 지급해야 된다는 상소가 계속되면서 새로운 정치문제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제기되었고, 신료들은 자연스럽게 폐비 윤씨를 복권(復權)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폐비 윤씨가 왕위를 이을 세자의 어머니이기에 결코 사가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윤씨 동정론에 위기를 느낀 인수대비는 몇몇의 후궁들과 모의를 하여 그녀를 더욱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었다. 폐비를 미워하는 자들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정희왕후(貞熹王后)·소혜왕후(昭惠王后)는 여전히 폐비를 혐오했고, 왕의 후궁들인 숙의(淑儀) 엄씨(嚴氏), 숙용(淑容) 정씨(鄭氏)는 폐비를 더욱 모함하였다. 윤씨가 사가에 나간 뒤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반성의 빛이 없다는 내용을 꾸며 왕에게 고해바쳐 그녀의 복권은 없던 일이 되었다. 그해 여름, 나라에 기근이 들고 세간의 물가가 오르자, 중신들은 폐비 윤씨가 아사(餓死)할 것을 우려하여 다시 별궁 안치를 권했다. 그러자 성종은 내관 안중경을 윤씨의 사가로 보내 그녀의 동정(動靜)을 살피게 했다.
그때 인수대비의 밀명을 받은 안중경은 폐비 윤씨에게서 반성의 빛을 찾아볼 수 없다는 허위보고를 올렸다. 한편으로 정희왕후도 성종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언문서한을 보내 결단을 독촉했다.
『과거 윤씨가 독을 가지고 첩을 살해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어린 원자를 끼고 ‘내 명이 장수하면 내가 할 일이 있다’고 협박했다. 또 주상에게 ‘눈을 도려내리라’ ‘흔적을 없애리라’ ‘손목을 절단하리라’ 등 험한 말을 했고, 주상이 편치 않을 때 즐거워하는 등 실로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