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종의 여인들-폐비 윤씨 5편
■ 성종의 여인들-폐비 윤씨 5편
성종은 왜 윤씨를 폐출시킨 것도 모자라 죽이기까지 했을까?
성종은 원자가 왕이 되었을 때 폐비 윤씨가 살아있다면, 왕의 모후로서 영향력을 발휘해 정국을 혼란하게 만들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성종은 폐비 윤씨를 죽이고 원자에게는 이 사실을 숨겨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폐비 윤씨 사사 사건 문제를 자신의 사후 100년간 언급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러나 이 유언은 지켜지지 않고 연산군의 폭정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 생모 윤씨가 폐출된 끝에 사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관련자 모두에게 피바람이 몰아닥쳤다. 결국 연산군 대에 일어난 불행의 씨앗은 성종이 뿌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윤씨가 폐비(廢妃)된 이후 조정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원자의 생모인 윤씨를 다시 왕비(王妃)로 복위시켜야 된다는 상소와 시위가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그에 따라 많은 조정대신들이 파직당하거나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연산군이 즉위한 뒤, 윤씨를 복위시켜야 된다고 하여 유배를 갔거나 파직당한 대신들은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반대로 윤씨 폐위에 앞장섰거나 복위에 동참하지 않았던 대신들은 무자비한 보복을 당했다. 대표적으로 한명회 한치형 윤필상 등이 있다.
1480년(성종11년) 11월, 중전 윤씨를 폐한 지 1년 후, 인수대비는 원자가 더 자라서 자신의 어미를 기억할까봐 하루빨리 새 중전(中殿)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수대비는 총애하던 정소용을 왕비로 올리려 했지만, 간택의 결정권을 쥐고 있던 대왕대비 정희왕후는 성품이 무난하고 분쟁의 요소가 적은 숙의 윤씨를 왕비로 간택했다. 폐비 윤씨의 아들 융은 무사히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세자 융이 13살이 되었을 때 새 왕비 정현왕후 윤씨에게서 진성대군(후에 중종)이 태어났다. 성종이 사망할 때 세자 융(연산군)은 18세였고, 진성대군 이역은 6세였다. 1494년 세자 융은 10대 임금 연산군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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