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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8일 목요일

세종대왕의 탄생 1편

■ 세종대왕의 탄생 1편

■ 세종대왕의 탄생 1편

세종은 우리 역사 상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칭송받고 있다. 세종시대는 우리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와 과학이 꽃을 피웠고 정치도 안정되었다. 또, 큰 전쟁 없이 백성들도 나름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외침이 많았고 전염병과 가뭄도 심했다. 그래서 세종 1년에 박위장군은 1만5천명의 군사로 대마도 정벌에 나섰고, 북방 여진족을 토벌하여 최윤덕장군에 의해 4군, 김종서장군에 의해 6진 개척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어쨌든 세종시대가 우리 역사상 최고의 시대라고 하는 것에 반론(反論)의 여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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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셋째 아들인 세종은 어떻게 왕이 되었을까? 어쩌면 태종의 철저한 계획 아래 만들어진 왕이라고 볼 수 있다. 태종이 처음부터 세종을 왕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다. 태종은 ‘왕자의 난’이라고 부르는 두 번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을 겪으면서 왕위에 오른 만큼, 다음 대에서는 장자승계원칙을 확실하게 자리 잡아 그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에 태종은 일찌감치 장자인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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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은 1404년 10살의 나이로 세자가 되었다. 세자시절 양녕대군은 품행이 자유분방하고 색을 밝혀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 양녕대군은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한 듯하였다. 양녕대군의 이런 모습은 태종은 물론 엄격한 규범적 생활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우려 대상이 되었다.

태종은 양녕대군에게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심지어 벌을 내리기도 하였지만 양녕대군은 변하지 않았다. 한 술 더 떠서 궁으로 기생 출신의 첩을 데려와 태종이 그 기녀를 사형에 처한 일도 있었다. 이후 양녕대군은 태종에게 더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 반감을 표현하는 상소까지 올리는 등 양녕대군의 품행은 자제되지 않았다. 이에 대신들이 상소를 하여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위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신하 중 유일하게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를 반대한 것은 뜻밖에 세종의 충신이던 당시 이조판서 황희였다. 황희는 이 일로 귀양까지 갔다. 결국 1418년 양녕대군은 세자 책봉 14년 만에 세자에서 폐위되었다. 그리고 태종은 그동안 눈여겨 보아왔던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책봉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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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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