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역병 대책
■세종의 역병 대책
1432년(세종 14년) 4월 ‘조선 판 코로나19’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극심한 역병(疫病)이 돌자, 세종은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토목·건설공사를 중단하라”는 명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역병(疫病)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세종은 감찰단을 파견하여 관리들의 전염병 대책에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 낱낱이 파악하게 하였다. 그런데 소격전(도교 주관의 제사 관장 부서)을 살피던 감찰단원의 보고가 올라왔다. “소격전 소속 여종 복덕은 시각장애인인데,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복덕은 아이까지 안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세종은 소격전과 한성부 북부지역(북부령) 책임자 등 관리 2명을 문책하여 형조에서 심문하도록 하고, 복덕에게는 쌀과 콩 각 1석(石)을 하사했다. 세종의 지시는 일회성에서 끝나지 않았다. 세종은 “복덕이 내가 내린 쌀을 다 먹은 뒤에는 또 굶을 것 아니냐”면서 “앞으로 복덕과 같은 백성은 그의 친척에게 맡기거나, 친척도 없다면 해당 관청(소격전)이 끝까지 책임지고 구호해야 한다”는 명을 내렸다.
전염병이라는 재난에 맞선 세종은 그야말로 ‘애민(愛民)군주’임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건국 초이므로 아직 제도가 확립되기 전인데다가 워낙 명철한 성군이었기에 만기친람(萬機親覽:임금이 모든 정사를 친히 돌봄) 그 자체였다. 1434년(세종 16년)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돌자 세종은 처방문까지 일일이 써서 전국에 내려주었다.
『내가 의서에 있는 처방(處方)과 약방(藥方)을 뽑아 적어 내린다. 수령들이 집마다 찾아다니며 알려주고 정성껏 치료해주라.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과인의 뜻을 저버리지 마라.』《세종실록》
세종이 내린 처방문에는 별의별 민간요법(療法)이 다 등장하고 있다. 그 중에는 발효시킨 콩씨와 불기운을 받은 아궁이 흙, 그리고 어린아이 소변을 섞어 마시는 처방도 있었다고 한다. 세종은 전염병으로 죽을 처지에 빠진 백성들을 직접 구휼했다. 1434년~35년 사이 전염병으로 죽은 함경도 백성이 3262명에 이른다는 보고를 받고 면포 5000필을 급히 나눠주었다. 조선 판 ‘재난지원금’을 내린 것이다.
1437년(세종 19년)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한성부 내 두 곳에 마련된 진제장(굶주린 자들의 무료급식소)마다 1000여 명씩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한 두 곳에 집단수용을 했던 것이 화를 불렀다. 해가 바뀌어 봄이 되면서 전염병이 이 급식소에 모인 백성들을 휩쓸었고, 이곳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세종은 가슴을 치면서 “대체 지금 이곳에서 사망자가 왜 속출했는지 그 사유를 낱낱이 기록하라”는 명을 내렸다. 7년 후인 1444년(세종 26년)에도 전염병이 휩쓸자, 세종은 “7년 전의 전철을 밟으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하면서 “백성들을 분산 수용하고 질병을 얻은 자는 다른 사람과 섞여 살게 하지 마라”는 지시를 내렸다.
세종은 분산 수용소의 관리를 중앙 및 서울의 5개 관청 공무원들에게 맡겼다.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면서 세종은 “백성들을 나눠 관리하도록 하는데, 만약 백성 한사람이라도 죽게 되면 관리책임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죽을 각오로 백성들을 관리하라는 뜻이었다.
예전에는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을 호구신(戶口神)이라 했다. 집집마다 돌면서 일으키는 역병(疫病)이라는 뜻이다. ‘호구거리’는 역병을 몰고 오는 ‘호구’가 탈을 부리지 못하게 하는 굿이다. 코로나19가 한시 빨리 진정되기를 바라는 ‘호구거리’라도 해야 하는 걸까.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