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현세자 3편
■ 소현세자 3편
청에 인질로 간 왕자들의 행보에 대해 인조는 매우 상반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소현세자가 조선의 국교인 유학보다 천주교를 가까이 하고 있다는 소식은 인조를 너무나 화나게 만드는 일이었다. 여기에 귀인 조씨와 김자점 등은 소현세자가 청국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다는 등 각종 모략을 일삼았다.
당시 조선 조정은 대부분 친명반청(親明反淸) 세력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소현세자의 활동을 친청(親淸) 행위로 규정하고 비난하였다. 인조 역시 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만큼 이 같은 태도를 취하는 소현세자를 좋아하지 않았고, 급기야는 그가 다음 왕위를 이어받을 인물로서 부적절하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인조가 총애하던 후궁 귀인 조소용과 세자빈 강씨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소현세자는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 용골대(龍骨大)를 비롯한 청나라 장군과 관리들을 달래기도 하고, 호령도 하면서 인질 생활을 이어나갔다. 병자호란 당시 주전파로 붙잡혀 온 김상헌을 비롯한 3학사를 처형의 위험에서 구해야 하는 문제도 있었고, 청(淸)에서 도망친 사람들에게 가해진 월형(刖刑:발뒤꿈치 자르기) 등의 상처를 치료해 주어야 했다.
또한 인질 생활에서 풀려나기 위해 내야 하는 엄청난 양의 속환(贖還) 비용과 전쟁에 패배한 대가로 바쳐야 하는 물품이 조선에서 도착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든 마련해서 납부해야 했다. 이때 두 팔 걷어 부치고 나선 사람이 바로 세자빈 강씨였다.
그녀는 조선의 발전된 농업 방법을 만주의 심양관 근처 둔전(屯田)에 적용하여 수확물을 거둘 계획을 세웠다. 농사 지을 노동력을 위해 세자를 설득해 엄청난 속환금이 필요한 조선인 인질들의 몸값을 치루고, 그들을 둔전(屯田) 경작에 투입했다. 그 결과 수 천 석에 이르는 수확물을 얻게 되어 항상 식량이 부족했던 심양관소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멀리 몽골 지역에서 소를 사와서 비싸게 팔기도 하고, 조선의 과일을 판매하는 등 심양관소에 활기가 넘치게 되었다.
게다가 수확한 곡식의 품질이 청나라 것보다 훨씬 뛰어나 자연히 강빈 농장의 곡물은 청나라 왕족들에게 높은 값에 팔려나갔다. 강빈은 사람을 시켜 농사를 짓는 데도 수완이 뛰어났고,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돈으로 해방시킨 조선인 포로가 수백 명에 달했다. 청과 조선의 본격적인 무역이 시작되자 심양관의 형편이 피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래량이 커졌고, 이 모든 거래를 강빈(姜嬪)이 직접 챙겼다. 거기다가 청의 요구를 조선 조정에 전달하는 공식문서인 장계도 강빈의 손을 거쳤다. 중국 장사꾼들도 조선 물품을 구할 일이 생기면 심양관으로 찾아왔다.
인조 21년 12월 14일에 《심양장계(瀋陽狀啓)》에서 조선 조정에 올린 보고에 의하면 6곳의 둔전에서 밭 9백 39 일반갈이, 씨 뿌린 것 2백 33섬 4말 7되, 생산된 곡식 5천 24섬 2말 9되, 목화 6백 20근을 거둬들였다고 보고되어 있다. 처음 세자 내외가 심양관소에 도착했을 당시의 상황과 완전히 다른 결과였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곳에서 세자빈의 슬기로운 경제대책으로 5천 섬이 넘는 곡식을 생산하게 된 것이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