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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5일 금요일

소혜왕후인수대비 5편

■ 소혜왕후인수대비 5편

■ 소혜왕후(인수대비) 5편

연산군의 광폭함을 모두 지켜 본 인수대비는 병들어 자리에 누웠다. 어느 날 연산군이 찾아오자 갑자기 일어나 바로 앉으면서, “이 사람들이 모두 부왕의 후궁인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하며 분노했다. 이 말에 흥분한 연산군은 자신의 머리로 할머니 인수대비의 몸을 들이 받았다.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는 설(說)도 있다. (설마........)충격을 받은 인수대비는 “흉악하구나.” 하며 자리에 누운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노약한 인수대비는 연산군과의 갈등과 마찰 속에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은 할머니의 죽음에 이르러서도 슬퍼하기는커녕 3년 상(喪)까지 폐지할 정도로 원한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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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죽음으로 잃어버렸던 왕비 자리를 아들을 통해 대비 자리로 보상받은 인수대비 한씨는 시부모인 세조 내외로부터 효부(孝婦)라는 글귀가 새겨진 도장을 받을 정도로 부덕을 갖춘 여성이었다. 21살에 청상과부가 된 이후로 자식 교육과 아랫사람을 경계함에 추호의 빈틈도 없어 ‘폭빈(暴嬪)’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하였다. 그녀의 강한 집념은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리는 동력이 되었으나, 한편으로 폐비 윤씨를 부덕한 여성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조선 왕실의 최대 비극이라 할 수 있는 연산군의 폭정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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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그녀의 삶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왕비를 거치지 않고 대비에 오른 특이한 이력을 가진 여성으로, 며느리를 쫓아낸 비정의 시어머니로 묘사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 여성 지식인의 대표 격으로 그녀의 삶과 업적이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는 재평가도 나오고 있다. 여성 교양서가 없었던 시절에 여성도 교육받아야 한다는 진보적인 생각을 한 인수대비였지만, 그녀가 생각한 여성의 교양은 남성을 우위에 둔 여성의 부덕(婦德)이었다. 또한 유교적 부덕을 갖추지 못한 여성은 비록 왕비라 해도 내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조선 성종 대는 우리 역사에서 유교이념이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시기였다. 여성의 유교적 부덕이 국가적 차원에서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소혜왕후(인수대비)는 덕종(의경세자)과 함께 동원이강형(정자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능이 형성)으로 조성된 경릉에 안장되었다. 경릉은 의경세자가 죽자 세조가 친히 수차례 묏자리를 물색하게 하고 산형도(山形圖)를 그려 친히 선지(宣旨:임금의 명을 내림)를 했다. 기록상 역대 가장 많은 곳의 상지(相地·자리 잡기)였을 만큼 수많은 곳을 찾았으니, 마지막에 오늘날의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으로 결정됐다. 1457년 10월 24일 세조는 세자의 조묘도감(왕릉을 조성하는 기관은 ‘산릉도감’인데 세자와 왕세자비 등의 능은 조묘도감이라 함.)에 무덤 안은 마땅히 후하게 하고, 무덤 밖의 석물은 간소하게 하라는 전지(傳旨)를 내렸다. “백성을 번거롭게 하고, 죽은 자에게는 유익할 것이 없다”는 세조의 능역 간소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경릉은 조선시대 최초로 조성된 세자의 묘(원)다. 조선시대에는 왕이나 왕비의 능침은 능(陵)이라 하고, 세자나 세자빈, 왕의 사친의 무덤은 원(園)이라 했다. 의경세자는 후에 덕종으로 추존받았으므로 능(陵)이라 부른다. 특이한 것은 인수대비의 능이 남편인 덕종의 능보다 더 화려하고 더 높은 위치에 묻혀 있으며 석물도 덕종의 능보다 인수대비 능이 더 많다는 것이다. 그것은 덕종은 세자일 때 승하했지만, 인수대비는 왕실 최고의 어른인 대왕대비일 때 승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수대비(소혜왕후)의 묘는 손자인 연산군이 조영했으므로 석물 등의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된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