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강松江 정철 5편
■ 송강(松江) 정철 5편
1570년(선조 3년) 4월 35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3년 상을 마쳤다. 모든 의례와 절차를 스승과 벗들에게 물어 예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함으로써 주위의 큰 칭송을 받기도 했다. 1572년 7월 복직하였으나, 1573년 4월 38세 때 다시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으로 낙향하여 다시 3년상을 치렀다.
1575년(선조 8년) 5월 모친의 시묘살이를 끝내고 복직하여 직제학, 성균관사성, 사간원사간 등을 역임했다. 그 무렵 조정에서는 이조 정랑 임명 문제로 심의겸과 김효원이 다투면서 동서 분당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그때 정철은 심의겸 편에 서면서 서인이 되었는데, 분열을 중재하려던 율곡 이이에게 불만을 품고 벼슬을 내던지고 담양으로 돌아갔다.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580년(선조 13년) 1월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된 정철은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두루 여행하며 《관동별곡》을 썼고,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훈민가〉 16수를 지어 가사문학에 큰 자취를 남긴다. 현지에 부임한 뒤에는 해묵은 폐단을 혁파하고 방치되어 있던 단종의 묘를 수축했으며 지방관을 독려하기 위해 〈고을의 관리들을 깨우쳐 인도하는 글〉을 짓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이 쓴 《관동별곡》은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팔경을 두루 유람하면서 산수(山水)를 노래하는 내용에 고사(故事)·풍속까지 삽입한 것으로, 몇 개월간 유랑하면서 심각한 직무유기를 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강원도에서는 정철을 부정적으로 보는 설화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어 정말 관찰사 업무를 잘 수행했는지에 대해서는 신빙성이 낮다. 실제로 백성들을 가혹하게 다루었고, 일처리가 공평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백성들이 정철(鄭澈)에게 얼마나 원한을 가지고 있었으면, 이름을 잘 모르는 물고기가 잡히면, "이놈, 정철아!" 하고 욕을 퍼부은 다음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는 소문도 돌았다.
1년 뒤 그가 전라 감사로 부임하자 그의 나쁜 평판 때문에 전라도사(全羅都事)였던 조헌이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했다. 정철이 만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율곡과 성혼에게 중재를 청하여 조헌을 간신히 주저앉히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조헌 역시 정철과 마찬가지로 성정이 과격한 인물이라 마음이 통했던지 곧 둘은 친해졌다. 이때 정철은 도내의 세액과 부역의 실상을 조사하고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일면도 보였다.
이후 승정원 도승지를 거쳐 1583년(선조 16년) 2월에 예조 참판이 되었고, 다시 함경도관찰사로 나갔을 때는 그곳의 시폐(時幣)를 상소로 올려 부정을 시정하기도 했다. 그해 3월에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자헌대부 예조판서에 특진되었다. 평소 술을 즐겨 위신을 잃는 일이 많고 승진이 너무 빠르다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거듭된 비판과 동인계 사간원 언관들의 집중공격을 받았지만, 선조 임금의 적극적인 비호를 받았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