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강松江 정철 8편
■ 송강(松江) 정철 8편
1592년(선조 25년) 7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 간 사람들도 풀어주어 활용하자는 결정에 의해 선조의 부름을 받아 복직한 정철은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수레를 따르며 호위함)하였다. 그러나 정철은 이 국난의 위기 상황에서도 술에 취에 긴급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등 업무에 태만했고, 그 일로 남인과 북인들의 비난도 받았다. 그러다가 그 해 5월 평양·개성·서울을 회복한 후 조선에 5만 군사를 보낸 명나라 대한 사은사(謝恩使)로 임명되어 연경(燕京)에 다녀왔는데, 이 자리에서 일본군이 철수했다는 가짜 정보를 올린 일이 문제가 되어 사직했다. 그 후 강화도 송정촌(松亭村)에 머물던 중 1593년 12월 병으로 사망하여 58세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묘는 처음에는 부모와 장남이 묻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마을에 있었지만, 1665년에 우암(尤庵) 송시열의 권유로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환희산 기슭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묘소는 1996년 1월 5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되었고, 그의 묘소 근처에 있는 사당인 송강사(松江祠)는 충북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철은 한마디로 매우 아집이 강하고 속이 좁아 주변 사람들이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괴팍한 성격이었다. 동전의 양면처럼 권력지향주의자라는 비판과 조선 최고의 시인이라는 추앙을 받으며 평생 조정과 유배지를 오갔던 정철, 이렇게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그에게도 온건한 관계를 유지했던 대인배가 있었는데, 하나는 율곡 이이이고 또 하나는 서애 류성룡이다. 특히 류성룡은 당파가 남인이었는데도 정철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니, 류성룡이야말로 진정한 대인배인 것 같다. 그 외에 노선이 일치하여 친밀했던 인물로는 같이 서인을 이끌고 정철과 마찬가지로 과격하게 정적들을 제거해 욕을 먹은 성혼도 있다. 한때 정철의 부관이자 의병장으로 유명한 조헌은 성질 더럽기로 악명 높은 정철이 자신의 상관으로 부임하자 사퇴를 청원했으나, 정철은 "그럼 잠깐만이라도 같이 일해보고 그래도 싫으면 가라."며 조헌의 스승인 이이를 통해 극구 말린다. 이후 둘은 나름대로 원만한 관계가 되는데, 이는 조헌 또한 기축옥사 당시 앞장서서 정여립 측근들과 동인 상당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과격파였기 때문이다.
《선조실록》에는 정철의 처신을 정치적 권력욕으로 규정하여 비난하고 있고, 《선조수정실록》은 정철의 행동을 결벽증에 가까운 곧은 인사로 묘사하면서 평가가 갈리고 있다. 선조는 정철에 대해서 총애할 때는 한 마리 매와 같은 사람이라고 칭찬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한 뭉치 독기로 사람을 해쳤다고 평가했다. 선조 역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무능한 군주(君主)임에 틀림없다.
- 9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