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 1편
■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 1편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은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 행위로 일어난 가장 대표적인 참변이다. 만세시위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책은 비인도적인 대량살육과 만행, 그리고 대규모 검거였다. 만세운동의 주동자로서 검거된 인사에 대해서도 참혹한 고문을 가한 뒤에 그들의 식민지 통치 법규에 따라 처형하였다. 우리나라의 만세운동 상황과 일제의 무력탄압은 국제적으로 여론화되어 열강들은 일제의 야만적 행위를 비난, 공격하였다.
3월 31일 제암리에서 가까운 발안(發安)장터에서는 장날을 기해서 약 1,000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태극기를 세워 놓고 독립 연설회를 개최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거리를 행진하였다. 흥분한 시위 군중이 일본인 가옥이나 학교 등을 방화, 파손하였다. 이튿날인 4월 1일 밤, 주변 산봉우리 80여 곳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운동을 널리 확대시키려했다. 그래서 그곳에 살고 있던 일본인 부녀자와 어린이는 조금 떨어져 있는 삼계리(三溪里)로 피신하여 숨어지내기도 했다. 이처럼 3월 말을 전후로 만세시위운동이 맹렬히 일어나자, 몇 개의 일본군 검거반이 파견되면서 3·1운동에 대한 보복 행위가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4월 2일 제1차 검거 작전을 시작하였다. 경기도 경무부에서는 하세베 이와오(長谷部巖) 대장이하 헌병과 보병, 순사로 이루어진 검거반을 보냈으며 6일까지 이어졌다. 시위의 진원지 역할을 한 마을을 습격 방화하고 시위 주모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항거하여 4월 3일 수촌리 구장 백낙렬 천도교 전교사, 수촌 제암리 감리교회 김교철 전도사, 석포리 구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이 주축이 되어 우정면, 장안면 주민 2천여명이 모여 각 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 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를 불태우는 한편 순사 가와바타를 처단하였다. 마침내 4월 5일 새벽 3시 반경에 검거반이 수촌리를 급습하여, 종교 시설은 물론 민가에 불을 질러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소실되었다(수촌리 학살 사건).
4월 9일부터 16일까지 검거반은 제2차 검거 작전을 벌였다. 4월 13일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하였다.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 유지가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불안 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제암리는 주로 안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며, 일찍부터 천도교의 교세로 민족정신이 고양되었고, 제암리감리교회에서는 문맹퇴치 및 신문화 운동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대한제국 시위대 해산군인 홍원식이 낙향하여 사람들을 모아 교육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구국동지회’를 만들었던 민중의 의식화가 상당히 이루어졌던 동네였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