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과 환국換局 3편
■ 숙종과 환국(換局) 3편
강력한 소년군주 숙종의 지원에다가 김석주의 은밀한 공작을 발판 삼아 집권을 하게 된 남인세력은 오래지 않아 둘로 분열되었다. 권력을 잡은 남인은 너무 오래간만의 집권이어서 그랬는지 힘이 강해지고 도가 지나치면 임금의 의심과 버림이 있다는 것을 간과(看過)하고 안일에 젖기 시작했다. 무사안일(無事安逸)이 불러온 대가는 혹독했다. 송시열 등 서인에 대한 강한 처벌을 요구하는 측과 비교적 온건한 측으로 갈리게 되었는데, 전자의 사람들을 청남(淸南)이라 불렀고, 후자 측 사람들을 탁남(濁南)이라 불렀다.
소년 숙종은 성장해가면서 권력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동안 서인을 악으로 간주하고 남인에게 힘을 실어 주었으나, 남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면 결국 임금도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숙종이 이런 생각을 하기까지 에는 김석주의 처세(處世)와 공작(工作)의 힘이 컸다.
원래 서인 출신인 김석주는 남인 정권 탄생에 기여했지만 허적이 이끄는 남인 정국을 그대로 두고 볼 생각은 애시 당초 전혀 없었다. 김석주는 뛰어난 처신으로 자신은 근왕파(勤王派)라는 것을 숙종에게 강하게 인식시키는 한편 허적 등 남인에 대한 숙종의 경계심을 한껏 자극시켰다. 오랫동안 집권하고 있던 서인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았다. 서인들은 윤휴, 허적 등 남인의 전횡을 비판하면서 공작정치에 능했던 김석주를 중심으로 남인 정권 축출에 나섰다.
1680년 마침내 그 기회가 왔다. 1680년(숙종 6년) 2월, 남인의 리더 영의정 허적은 조부(祖父)가 시호(諡號)를 받은 것을 축하해 대신들을 불러 축하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이날은 비가 많이 내렸는데, 숙종은 허적을 위해 왕의 잔치 때 쓰는 유악(帷幄:기름 먹인 장막)과 차일(遮日:햇빛가리는 가림막)을 허적의 집에 갖다 주라는 지시를 하였다. 그러나 허적은 이미 궁중의 유악과 차일을 갖다 쓰고 있는 중이었다. 이를 안 숙종은 "과인의 허락도 없이 임금의 물건을 가져갔단 말이냐. 한명회도 못한 짓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라며 대노했다.
숙종은 그날로 남인이 맡고 있던 훈련대장(訓鍊大將), 총융사(摠戎使) 등의 병권(兵權)에 관한 요직(要職)을 서인 측 인물로 물갈이 해버렸고, 승지(承旨)와 대간(臺諫:사헌부와 사간원)마저 대거 서인으로 교체했다. 이어서 남인인 좌의정, 우의정, 대사헌이 사직(辭職) 소(訴)를 올리자 즉시 이를 수리해버렸다. 또 새로 제수된 서인 대간들이 남인의 비위(非違)를 들먹이며 파직과 유배를 주청(奏請)하자 숙종은 이를 모두 받아들였다. 이렇게 전격적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된 사건을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 한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