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과 환국換局 4편
■ 숙종과 환국(換局) 4편
경신환국의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는 유악(帷幄) 사건은 갑작스런 환국(換局:시국이 바뀜)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음모로 보인다. 허적의 잔치는 숙종이 이미 아낌없는 지원을 한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고, 특히 임금의 유악을 말도 없이 가져다 쓰는 일은 매우 신중한 허적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신환국(庚申換局)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김석주가 오래도록 준비한 공작이었고, 김석주의 노련한 공작에 세뇌된 숙종의 전격적인 뒤집기 한판이었다.
경신환국 이후 김익훈, 신여철 등 서인이 요직을 차지했고, 갑인예송 이후 철원으로 유배 가 있던 서인 김수항은 석방됨과 동시에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경신환국은 남인 축출의 신호탄에 불과했다. 경신환국이 단행된 일주일 후 공작정치의 명수 김석주는 자신이 파견한 정탐조를 통해 허적의 서자(庶子)인 허견 등이 남인과 가까운 복선군(福善君: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고변서(告變書)를 올렸다.
이들은 모두 잡혀와 고문 끝에 허견(許堅)은 능지처참 되었고, 왕으로 추대될 것이라고 말이 나왔던 복선군(福善君)은 교수형을 당했다. 허견의 아버지 허적(許積)은 처음에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여 죽음을 면하였으나, 뒤에 악자(惡子)를 엄호하였다 하여 죽임을 당하였고, 이에 연루되어 모두 100여 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바람에 남인(南人)은 철저히 몰락하고 말았다. 숙종의 나이는 당시 겨우 20세에 불과했다.
김석주가 주도한 정치 공작은 결과적으로 남인의 축출과 서인 득세의 권력 교체를 가져와 남인이 떠난 자리를 서인들이 채웠다. 서인은 곧바로 잃어버린 6년의 복구에 나서, 먼저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복권(復權)시켰다. 송시열의 유배생활은 사형수의 하루하루나 다를 것이 없었다. 남인들은 틈만 나면 송시열을 사사(賜死)하려 했고, 결단이 빠른 왕이 언제 명을 내릴지 몰랐기 때문이다. 때문에 남인 정권을 몰아낸 김석주는 구원자나 다름없었고, 이런 이유로 송시열은 이후 여러 방면에서 김석주와 뜻을 같이 했다.
최강 권력자의 꿈을 이룬 김석주는 남인의 복귀 가능성을 우려해 남인을 사실상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우고, 어영대장 김익훈을 파트너로 삼아 남인들을 역모로 엮기 위해 동분서주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김석주와 같은 외척(外戚) 발호(跋扈:함부로 날뜀)와 공작정치에 크게 염증을 느낀 서인 측 신진사류들은 증거도 없이 사건을 만든 김익훈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펼쳤다.
서인들의 주목을 받으며 다시 등장한 송시열은 김익훈을 싸고 돌며 그 처벌에 반대했다. 다른 때 같으면 송시열의 한마디로 사태가 잠잠해졌겠지만, 송시열이 김석주로 인해 변했다고 생각한 신진사류들이 이번에는 크게 반발했고, 이때 사림에서 송시열 다음으로 존경을 받던 박세채가 소를 올려 신진사류들 편을 들어 주었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