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과 환국換局 6편
■ 숙종과 환국(換局) 6편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몰락하고 정국은 다시 남인 세상이 되었다. 장희빈이 정식 왕비가 되고, 희빈의 오빠인 장희재 등 장씨 일가가 득세했다. 인현왕후는 폐위되어 안국동 사가(私家)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무렵 무수리 출신의 한 궁녀가 숙종의 눈에 띄었다. 후에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이다.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를 시종했던 궁녀 출신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된 이후에도 그녀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키는 모습을 보여 숙종을 감동시켰다. 숙빈 최씨의 등장은 장희빈을 향하고 있던 숙종의 마음을 크게 변화시켰고, 조정에는 또 다시 격변(激變)의 바람이 불었다.
1694년 4월 숙종은 남인 우의정 민암 등이 서인을 제거할 목적으로 고변 사건을 일으키자, 오히려 민암에 대해 군부를 우롱하고 신하들을 도륙(屠戮)하려 했다고 질책하면서 권력에 포진해 있던 남인을 대거 숙청한다. 이것이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갑술환국으로 권력은 다시 남인에서 서인으로 교체됐고, 남인의 지지를 받던 장희빈도 폐출(廢黜)됐다. 갑술환국으로 남인은 더 이상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없을 지경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숙종은 조선 후기 당쟁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를 살았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46년간 장기 집권하는 동안 신권에 맞서 싸우면서 왕권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1680년의 경신환국(庚申換局), 1689년의 기사환국(己巳換局),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 이렇게 세 번의 환국은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던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들이다. 하지만 환국의 진정한 승리자는 왕 숙종이었다. 어느 한 당파의 정치적 독주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왕권을 강화한 숙종의 정치 역량은 영조 대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는 기반을 제공했다.
숙종 대에 여러 작은 사건들은 일어나긴 했으나 대규모 반란이나 역모 사건이 없어 숙종은 대체로 성공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숙종은 광해군대에 시행되기 시작한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했고, 숙종 38년에는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에 50개의 돈대(墩臺)를 쌓아 국방을 강화했다. 또,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널리 퍼뜨려 화폐경제를 정착시켰다는 것도 치적 중 하나이다. 또한, 왕실 관계자들의 복권(復權)에 앞장서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죽은 방번과 방석을 복권시켜 각각 무안대군과 의안대군으로 추증하고 국가 제사를 받도록 했다.
"또 이방원에 의해 허수아비 왕 노릇을 잠깐 하고 묘효(廟號)도 없었던 공정대왕(恭靖大王)에게 정종이라는 묘호를 올렸고, 노산군의 묘호를 단종으로 정했다. 또 《노산군일기》를 《단종실록》으로 승격시켜 단종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그에 따라 자연히 사육신(死六臣)도 복권(復權)되어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의 의리론과 명분론을 철저하게 조선사회 내에 구현했지만 그렇다고 이념만 추구하진 않았다. 상평통보 유통과 같이 실리적인 경제 개혁을 단행해 상업과 유통경제가 균형 있게 발전해갈 수 있는 기틀도 마련했다.
",- 7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