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과 환국換局 7편
■ 숙종과 환국(換局) 7편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보다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延㭁君)을 더 이뻐했다. 원래 왕자나 공주가 혼인을 하면 궐 밖에 나가 살게 마련인데, 연잉군은 혼인한 후에도 8년이나 숙종의 곁에 데리고 있었다. 연잉군(延㭁君)에 대한 이같은 숙종의 사랑은 연잉군으로 하여금 왕위에 대한 야심을 키우게 했다.
숙종은 50이 넘으면서부터 자주 병에 시달렸다. 특히 안질(眼疾)이 심해 거의 시력을 잃었고 늘 두통에 시달렸다. 그런데다 전국에 자연재해가 들고 역질(疫疾)이 돌아 숱한 사람이 죽었다. 병에 지친 숙종은 이이명(李頥命)을 불러 독대한 후 후사를 부탁하고 세자(장희빈 소생으로 후에 경종)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도록 명했다. 그리고는 세자에게 아들이 없으니 뒷날 연잉군(후에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삼아 왕위를 계승케 하라고 이이명(李頥命)에게 비밀리에 당부를 했다.
병약한 데다 노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가 왕위를 이었을 때 뒷감당을 못할 것을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숙종은 일단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다음 실정(失政)을 꼬투리 잡아 폐세자시키고, 연잉군(延㭁君)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면 자신이 평생 추구해 온 강한 왕실도 유지되고, 세자와 연잉군 둘 다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자의 대리청정은 아무 문제가 없어 노론의 극심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세자는 무난히 경종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1720년 6월 8일 숙종은 경희궁에서 60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숙종 이전까지 60세 넘도록 살았던 왕은 태조(74세), 정종(63세), 광해군(67세)에 불과했다. 하지만 세 왕은 모두 왕위에서 물러난 후 승하했다. 반면 숙종은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60세를 넘긴 최초의 왕이다. 숙종의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자락에 조성된 명릉(明陵)이다.
명릉은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무덤이 함께 있는 쌍릉의 형식인데, 두 번째 계비인 인원왕후의 무덤도 명릉 좌측 언덕에 위치해 숙종을 지켜보고 있다. 첫 번째 왕비였던 인경왕후의 익릉 또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여기에 더해 숙종 하면 떠오르는 인물 장희빈의 무덤은 원래 경기도 광주(廣州) 오포읍에 있다가 1970년 명릉 근처로 이장됐다. 이로써 숙종은 죽어서도 자신의 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숙종을 대개 기존 사극 드라마에서 봐왔던 이미지로, 인현왕후와 장희빈, 숙빈 최씨의 치마폭에 둘러싸여 궁중 음모의 중심에 있었던 왕으로 보는 시각이 크다. 하지만 숙종의 본모습은 적장자라는 정통성을 바탕으로 오랜 기간 재위하면서 왕권을 본격적으로 행사한 ‘강한 왕’이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방 등 각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펼치며 왕조의 안정을 구축해 나갔다. 숙종 시기를 거치며 조선은 왜란과 호란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다. 조선의 르네상스이자 정치, 문화 황금기라고 불리는 영·정조 시대가 만들어진 것은 숙종이 기반을 잘 닦아뒀기 때문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