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의 여인들, 인경왕후 3편
■ 숙종의 여인들, 인경왕후 3편
인경왕후는 날 때부터 울음소리가 약하고 조용했으며, 자라서도 말수가 적고 존귀함이 있었다고 한다. 먹을 것이 있으면 기다렸다 모두가 모인 뒤 나누고, 화려함을 자제하고 품성을 갖춰 사가에서는 인경왕후를 “천제(天帝)의 누이동생 같다.”며 극찬했다. 왕실에 들어와서는 가언(嘉言:좋은 말)과 선행을 즐겨 듣고, 삼궁(三宮)과 사성(四聖)을 모시는 일에 정성을 다했으며, 몸이 아플 때도 혼정신성(昏定晨省:저녁에 부모의 이부자리를 보살펴드리고, 아침에 안부를 묻는 것)을 빠뜨리지 않는 효부였다.
14세에 숙종은 장렬왕후 조대비를 시중들던 장나인(옥정)과 눈이 맞아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러니 인경왕후는 찬밥신세가 된다. 장옥정은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노골적으로 접근했고, 숙종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인경왕후는 장렬왕후 조대비를 찾아가, "주상이 장나인의 처소에서 침소를 드는 것은 왕실에 누가 될 수 있사오니 장나인에게 처소를 따로 정해 주시도록 하시옴이 옳을까 아뢰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장나인의 처소는 응향각(凝香閣)으로 옮겨져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게 된다. 참 훌륭하고 현명한(?) 중전이시다. 장나인(장옥정)은 이렇게 훌륭한 인경왕후를 헐뜯고 이간질 하다가 장렬왕후 조대비에게 걸려 궁궐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때 장나인은 스물하나, 숙종은 열아홉이었다.
",숙종은 즉위 한 달 후, 제일 먼저 아버지 현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신하들에게 행장을 짓게 했다. 조선시대에는 어떤 분이 돌아가시면 그 분의 일대기를 행장(行狀)으로 쓰게 되는데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완성된 행장을 본 숙종은 불같이 화를 낸다. 문제가 된 부분은 당대 정치적 거물인 송시열에 관한 것이었다. 이로써 14살 숙종과 68살 송시열의 기 싸움이 시작되었다. 당시 송시열은 나이가 이미 68세로, 정계 원로(元老)에다가 숙종의 증조부인 인조, 효종, 현종 3대에 걸쳐 정계·사상계의 중심에 있었던 정치적·학문적 거물이었다.
현종의 행장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 서인인 송시열의 예송논쟁 부분이었다. 행장을 맡은 분이 송시열의 제자인 이단하(李端夏)였으므로 당연히 스승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이에 숙종은 이단하에게 집요하게 몇 차례나 강압적으로 밀어 붙여, 송시열이 예송논쟁에서 예(禮)를 잘못 적용했다고 공식적으로 쓰도록 요구하였다.
당시는 신권이 셌고, 아무리 왕명이라고 해도 대유학자로 우러러 받고 있던 송시열을 비난하는 행장을 쓰기가 힘들고 꺼림칙했던 이단하는 행장을 다 쓰고 난 뒤 숙종에게 "송시열의 잘못된 점을 전하께서 요구해서 어쩔 수 없이 썼습니다." 라고 항변했다. 이 말을 들은 숙종은 정색을 하고 이단하를 크게 나무랐다. 2차 예송논쟁에서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남인들은 송시열을 파직시키라고 요구했고,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남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