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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0일 수요일

숙종의 역사 바로 세우기

■ 숙종의 역사 바로 세우기

■ 숙종의 역사 바로 세우기

숙종(1661~1720년)은 46년간 재위하면서 역사 바로 세우기에도 중점을 둔 왕이었다. 숙종 시대는 조선사회 지배 이념으로 자리를 잡은 성리학이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는 시기였다. 정치와 사회의 모든 기준점은 성리학 의리와 명분에 의해 결정됐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해결하지 못한 과거사(過去事)가 있었다. 바로 세조에 의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됐던 단종의 왕위를 회복하는 문제였다.

왕의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단종과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死六臣)의 복권(復權)은 언젠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였다. 조선 왕실 입장에서도 단종은 연산군이나 광해군같이 정치적으로 축출된 왕과는 분명히 구분돼야 하는 존재였다. 사육신 또한 의리와 충절이라는 성리학 기준에서 보면 국가에서 적극 표창해야 할 인물이었다.

이런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숙종 이전 왕들은 단종과 사육신의 명예를 회복시키지 못했는데, 이는 이들을 죄인으로 만든 세조의 처분 때문이었다. 단종의 묘호를 회복하고 사육신 충절을 국가적으로 공인하면, 세조의 왕권 자체에 큰 흠결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16세기 이래 재야 사림파 학자를 중심으로 사육신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고 이들 정신을 따르려는 경향이 강했지만, 국가가 이를 인정하기엔 시간이 필요했다.

사육신을 국가적으로 포상해야 한다는 논의가 꾸준히 제기됐지만 그 어떤 왕도 사육신을 ‘국가의 충신’으로 공인하는 데는 주저했다. 그런데 230여년이 지난 후, 숙종이 스스로 총대를 멨다. 숙종은 1691년(숙종 17년)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하고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특단의 조치를 단행했다.

숙종은 사육신에 대해 ‘당시에는 난신(亂臣)이나 후세에는 충신(忠臣)’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래서 사육신의 복권 조치가 결코 선왕인 세조의 뜻과 어긋나지 않는 것임을 강조했다. 사육신 복권과 함께 1698년(숙종 24년) 11월 6일 노산군에게는 단종이라는 묘호가 내려졌다. 단종이 역사 속에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다. 1457년 세조에 의해 죽음을 당한 후 묘소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했던 단종은 숙종에 의해 ‘단종’이라는 왕위를 회복했다. 무덤 역시 왕릉으로 인정받아 ‘장릉(長陵)’이 됐다.

어린 단종과 생이별 후 쓸쓸하게 말년을 보냈던 단종의 부인 송씨도 이때 ‘정순왕후’로 왕비의 위상을 되찾아 그녀의 무덤 또한 ‘사릉(思陵)’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숙종대인 1691년에 집행된 사육신의 복권과 1694년 단종의 왕위 회복은 성리학의 핵심인 충의(忠義) 이념을 왕실이 주체가 돼 회복시키려는 의지를 실천한 것이었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사당 현충사(顯忠祠)를 처음 세운 것도 숙종이었다. 이것은 충(忠)의 이념을 확산시켜 위기가 닥쳤을 때 신하와 백성들의 충절을 이끌어내려는 의도였다. 왕이 성리학 이념 실천을 주도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전국에 서원과 사당이 세워졌다. 숙종 대를 전후로 전국 166곳에 서원이 설치됐고 이 중 105곳은 국가에서 지원을 받았다.

서원에는 면세와 면역(병역이나 부역 의무를 면함)의 특권이 부여되어 국가 경제를 어지럽히고 당쟁의 온상이 되는 등 그 폐단도 매우 컸다. 이에 숙종은 1714년 이후부터 서원 건립을 금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조선시대 서원과 사우(祠宇:사당)가 가장 전성기를 맞은 것은 숙종 시대였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