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험장은 난장판 1편
■ 시험장은 난장판 1편
조선시대 과거는 시험으로 인재를 뽑았다는 점에서 아주 선진적인 제도였다. 과거시험은 종류도 많았으며 여러 단계를 거치게 했다. 하지만, 과거시험의 부정행위도 늘 말썽이 됐다. 그래서 본디 과거제의 부정행위를 방지하려는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과거 시험장을 1소(所) 2소(所)로 나누어 시험을 치르게 했다. 부자나 형제 또는 가까운 친척이 한 곳에서 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였다. 형제가 같은 시기에 시험을 볼 경우 각기 다른 장소에서 보게 한 것이다. 또 시관도 가까운 친척이 응시할 경우에는 이를 피하게 했다. 이를 상피제(相避制)라 했다. 시험장의 입구에는 문지기인 수협관(搜挾官)을 세워두었다. 응시생들은 시험장 안에 종이, 붓, 먹, 벼루 이외에는 어떤 물건도 갖고 들어가지 못했다. 만일 책 따위를 숨기고 들어가다가 들키는 경우는 몇 년씩 응시자격을 박탈하는 조치를 내렸던 것이다. 수협관은 응시생들의 몸수색을 철저히 했다.
또 시험장에는 응시생과 종사자들 이 외 어느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양반 자제들은 평소 나들이할 때 시중을 드는 수종(隨從)을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과거시험장에서는 수종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일 잡인이 시험장에 들어간 사실이 발각되면 누구든 즉시 체포해서 수군(水軍)으로 보내게 했다.
응시생의 입장이 끝나면 여섯 자 간격을 두고 앉힌다. 답을 쓸 동안 군데군데 감독관이 배치되어 부정행위를 감시한다. 《경국대전》 같은 책을 들여와 베끼는지, 모르는 글자를 찾으려 옥편을 들추는지, 남의 답안지를 엿보는지, 미리 답안지를 작성해 슬쩍 끼워 넣는지, 외부에서 답안지를 들여와 바꿔치기를 하는지, 두 사람이 답안지를 작성하고서 한 사람의 것만 내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규정을 어기거나 부정행위가 적발되면 두 번의 응시자격(6년)을 박탈했다. 모의해서 남의 글을 낸 사실이 발각되면 곤장 100대를 치고 징역 3년의 처벌을 내리거나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
응시생에게는 시험지에 이름을 쓰고 종이를 붙여 가리게 했다. 수권관(收券官)은 시험지를 받아 살펴보고 등록관에게 넘겨준다. 등록관은 시험지의 맨 끝에 수험번호인 자호(字號:천자문의 순서대로 써서 매긴 순번)를 쓰고 도장을 찍어 가운데를 자른다. 이름 부분이 잘려나간 시험지를 등록관이 다시 베껴서 시관에게 올린다. 시관이 시험지를 채점할 적에 누구의 답안인지 모르게 한 것이다. 이런 갖가지 방지 장치와 엄한 처벌규정을 두었는데도 부정행위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으며 그 방법도 갈수록 교묘해졌다. 초기에는 비교적 부정행위가 적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정치적 혼란과 관기 문란을 틈타 부정행위가 만연하게 되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