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험장은 난장판 3편
■ 시험장은 난장판 3편
1686년(숙종 12년) 4월3일 숙종이 명륜당에서 과거시험을 본다는 소식을 들은 전국의 선비들이 먼저 들어오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다가 8명이나 압사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숙종실록》은 『죽은 자들뿐 아니라 위독한 사람들도 많아서 성균관 주변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부잣집 자식은 입에 아직 비린내가 나고 아직 고무래 丁(정)자도 몰라도 거벽의 글과 사수의 글씨를 빌려 시권(답안지)를 제출한다.』 《경세유표》
이 같은 다산의 말처럼 돈이 있고, 행세깨나 하는 집안의 자제는 고무래 丁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라도 ‘거벽’과 ‘사수’, ‘수종’ ‘노유’ ‘선접’ 같은 ‘부정시험단’의 도움으로 합격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시험이 왜 이렇게 난장판이 됐을까. 따지고 보면 조선은 ‘시험의 나라’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보통 5살 때 과거공부를 시작한다면 무려 30년 이상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서 시험을 치러야 겨우 대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국가시험만 4차례 거쳐야 했다. 과거시험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실시됐다. 수험생들은 한번 떨어지면 최소 3년을 기다려야 했으니 합격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우선 예비시험인 소과의 경우 초시(1400명 선발)를 거쳐 복시를 통과한 200명이 생원(100명)·진사(100명)가 됐다. 생원·진사가 돼야 본시험인 대과(문과)를 치를 수 있었다. 대과 역시 1차 시험격인 초시에서 240명을 선발했고, 다시 이 240명이 2차 시험인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렇게 4차례의 시험에서 뽑힌 33명의 과거급제자가 꿈에 그리던 문관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행정고시 최종합격자이다. 3년에 한번 씩 불과 33명을 뽑는 행정고시였던 셈이다. 그랬으니 합격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기상천외한 사건이 1705년(숙종 31년) 2월18일 터졌다. 성균관 인근 동네에 살고 있던 여인이 나물을 캐다가 땅속에 묻힌 노끈을 발견하고는 잡아당겨 보았다. 그랬더니 이 노끈은 명륜당 뒤 산 쪽에서 성균관 담장 밑을 통과해서 과거시험장 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대나무 통을 묻고 그 속에 노끈을 연결한 것이다. 그 날짜 《숙종실록》은 『이것은 과거장에 들어간 유생이 노끈을 이용해서 외부인이 작성한 답안을 받았다는 것이다.』라고 단정했다.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는데, 이와 같은 노끈이 여러 개 발견된 사실만 추가 확인했고, 범인색출에는 끝내 실패했다. 이것은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컨닝페이퍼를 콧속이나 붓대에 숨기기도 했고, 시험관에게 뇌물을 주거나, 남의 답 베끼기, 대리시험 보기 등등 수법도 다양하고 치밀했다고 한다. 종이로 만든 속옷에 글을 써서 입거나 아주 작은 책을 만들어 옷 속에 숨겨 들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