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험장은 난장판 4편
■ 시험장은 난장판 4편
응시생과 시관(試官)이 짜고 부정으로 합격시키는 방법도 있었다. 그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시관이 시험문제를 미리 일러주어 집에서 답안지를 작성해 제출하는 방법, 응시생이 답안지에 점을 찍는 따위 암표(暗票)를 하여 누구의 답안지인지 알게 해서 시관이 합격시켜주는 방법, 종사원에게서 자호를 알아내 시관에게 알려주는 방법 등등이 동원되었다. 또 시관의 보조역할을 맡은 등록관을 매수해 답안지를 베낄 때 잘못 놓여진 글자나 엉터리 문맥을 바로잡아 고치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이를 역서(易書)라 한다. 또 종사자를 매수해 다른 합격자의 이름을 답안지에 바꿔 붙이게 했다. 이를 절과(竊科)라 했다. 다른 합격자를 떨어뜨리고 자신이 합격하는 가장 악질적 방법이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응시자가 기하급수로 늘면서 과거장은 더욱 난장판으로 변해갔다. 특히 정기시험(식년시) 외에 부정기로 치르는 특별시험의 경우 과열양상이 두드러졌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기록된 1800년 3월21~22일의 왕세자(순조)의 책봉을 축하하기 위한 특별과거. 이틀간 치른 이 시험에 문과에만 무려 21만 명이 응시했다. 이틀간 답안지를 제출한 응시생만 해도 7만1498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최종 합격증을 받은 응시생은 단 12명에 불과했다. 경쟁률이 자그만치 1만8000 대 1이었던 것이다. 이때의 한심한 시험장 모습을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경세유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문장에 능숙한 자를 거벽(巨擘), 글씨에 능한 자를 사수(寫手), 자리와 우산 같은 기구를 나르는 자를 수종(隨從), 수종 중 천한 자를 노유(奴儒), 노유 중 선봉이 된 자를 선접(先接)이라 이른다.』
과거시험을 보는 유생 1명에 최소 5명이 붙어 역할분담을 하여 도와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6인 1조의 ‘입시비리단’이다. 각자는 어떤 역할을 맡았을까. 우선 과거장에 먼저 들어가야 유리했다. 지금처럼 수험번호에 따라 지정좌석에 앉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조건 먼저 들어가서 현제판(懸題板·과거 때 시험문제를 거는 널판지)에 게시되는 문제를 잘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차지해야 했다. 수만 명이나 되는 응시자를 두고 반나절 사이에 합격자 방을 내걸어야 했으므로, 지친 시험관은 붓을 잡기에도 신물이 나서 눈을 감은 채 답안지를 읽지도 않고 내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 내야 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때 필요한 자들이 바로 ‘선접’과 ‘수종’그리고 ‘노유’였다. 이들은 과거시험장인 창경궁(춘당대) 밖에서 등불을 밝히며 밤새워 기다렸다가 새벽에 궐문이 열리면 좋은 자리 확보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였다. 우산대와 말뚝, 막대기 등을 휘두르며 달려가 우산일산(日傘)을 펴고 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이들이 머리에 검은 유건(儒巾:유생들이 쓰는 관모)을 써서 수험생으로 위장했음은 물론이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