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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 일요일

신돈은 과연 요승妖僧인가 2편

■ 신돈은 과연 요승妖僧인가 2편

■ 신돈은 과연 요승(妖僧)인가 2편

신돈은 1365년(공민왕 14년)에 진평후에 봉해진 뒤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사 판중방감찰사사 취산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판서운관사(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領都僉議使司事判重房監察司事鷲山府院君提調僧錄司事兼判書雲觀事)’라는 역사상 가장 긴 관명을 받았다. 신돈은 정식 관명을 가진 고려의 관리로서, 그가 정권을 잡은 6년 동안 우리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최대의 개혁 정책을 펼쳤다.

신돈이라는 인물은 우리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캐릭터이다. 본관은 영산(靈山). 승명은 편조(遍照). 공민왕이 내린 법호는 청한거사(淸閑居士)이다. ‘신돈(辛旽)’은 집권 후에 정한 속명이다. 신돈의 아버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고, 영산에 무덤이 있었다는 것만이 확인될 뿐이다. 어머니는 옥천사의 노비였다고 전해진다.

신돈은 1358년(공민왕 7년) 공민왕의 측근인 김원명의 소개로 공민왕을 처음 만나게 되어 궁중에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공민왕이 처음 신돈을 만났을 때 그는 글은 몰랐지만 언변이 좋았다. 또한 공민왕을 만날 때에는 겨울이든 여름이든 늘 해진 가사 한 벌만 입어서 눈길을 끌었다. 당시 공민왕은 독실하게 불교를 받들었고, 보우를 국사로 모시고 불교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을 때 였으므로, 총명한 신돈은 왕에게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1365년 공민왕이 너무나 사랑하던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애를 낳다가 죽었다.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죽음을 지나치게 애도한 나머지 7일마다 승려들로 하여금 범패를 부르며 상여를 따르게 했다. 행사 때마다 빈전(殯殿, 발인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는 전각)에서 절문까지 찬란한 깃발이 길을 덮게 했고 비단으로 절 건물을 휘감게 했다.

이때부터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빛을 잃었다. 고려 조정에서도 지나친 불교 의식을 비난하고 나섰다. 이때 공민왕은 하나의 대안을 냈다. 변조遍照, 신돈의 불명, 변은 불교식 발음를 불러 사부로 삼고 정사를 맡긴다는 것이었다. 그동안에도 공민왕은 그를 가끔 불러서 자문을 구해 오고 있었다. 공민왕의 이런 결정에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거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를 배척하던 인물들이 사라진 뒤에 점차 정치 표면에 나서면서 왕으로부터 ‘청한거사’라는 호를 받고, 왕의 사부(師傅)가 되어 국정을 자문해서 왕이 따르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추종자가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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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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