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2편
■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2편
6세기 전반기에 신라는 주변의 조그만 나라나 가야·고구려와 같은 큰 나라를 상대로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많은 병사를 필요로 했고, 이 때 새로운 군사제도가 만들어졌다. 화랑도가 국가에 의해 정식으로 제정된 것도 진흥왕 때(540∼576)의 일이다. 확실한 제정연대는 알 수 없으나, 562년의 대가야 정벌에 사다함(斯多含)이 화랑의 자격으로 종군하고 있는 만큼 제정연대는 이보다 빠른 시기인 것이 확실하다.
초대 화랑은 설원랑(薛原郎)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신라 조정이 화랑도 제정을 서두른 것은 핵심이 되는 군대를 보충할 병력이 당장 필요했고, 장기적으로는 화랑도를 통해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화랑도는 이처럼 궁극적으로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교육기관의 임무를 띠고 출발한 제도였으나, 법률로서 제정된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었다. 종전에 있던 촌락공동체적인 청소년조직의 전통과 중국 율령(律令)의 도입을 통해서 만들어진 관청조직의 원리를 결합시켜 만든 일종의 반관반민(半官半民) 성격을 띠는 청소년 조직체였다.
이와 같은 조직은 고구려에도 있었다. 경당(扃堂)이 바로 그것인데, 이것은 화랑도와 마찬가지로 청소년조직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여기서 미혼 청년들이 학문과 도의를 닦고 무술을 연마하였다. 신문왕 때에 정규 국가적 교육기관인 국학(國學)이 완비된 뒤에도 화랑도가 교육적 기능을 지니는 민간 조직으로서 여전히 존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화랑도는 한 시대에 하나의 집단만이 존재한 것은 아니다. 화랑도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진평왕 때에는 많을 때는 7개 이상의 화랑집단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들 여러 개의 집단을 통솔할 중심기관 또는 중심인물이 필요했던 듯 한데 화주(花主)가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되고 있다. 화랑도는 각기 화랑(花郞) 한 명과 승려 약간 명,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다수의 낭도(郎徒)로 구성되어 있다. 낭도의 수는 일정하지 않으나, 많을 때는 1천명이 되기도 하였다. 화랑은 각 집단의 중심인물로서 용모가 단정하고 믿음직하며, 무예가 뛰어나고 통솔력 있는 진골귀족 가운데서 낭도의 추대를 받아 뽑혔다. 아마도 요즘 아이돌같은 재주와 용모를 가진 엔터테이너였을 것이다
768년(혜공왕 4년) 신라에 사신으로 온 당나라 고음(顧愔)의 견문기인 ≪신라국기(新羅國記)≫에 『귀인 자제 가운데 어여쁜 자를 뽑아 분(粉)을 바르고 곱게 단장해 이름을 화랑이라 했으니 나라사람들이 모두 높이 섬긴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입증해 준다. 신라시대를 통틀어 화랑은 모두 2백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화랑도 내의 승려들은 월명사(月明師)의 경우에서 보듯 노래 가사를 짓거나 화랑집단이 어떤 의식을 집행할 때 도와주는 등 주로 지적·정신적인 면에서 화랑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던 만큼 학문적 교양이 풍부한 사람이 뽑혔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