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4편
■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4편
이처럼 화랑도는 성원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결합되어 공동목표를 위해 일정한 기간 동안 수련하는 단체였던 만큼 성원간의 인적 결합관계는 매우 단단하였다. 그들 사이의 우정은 단순한 우정관계가 아니었다. 사다함의 경우, 동료인 무관랑(武官郎)과 사우(死友)를 약속했고, 무관랑이 병으로 죽자 통곡한 나머지 그 자신도 병사할 정도의 관계였다. 이 점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남자들만의 조직인 화랑도 성원 사이에 일종의 동성애가 행해진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어떻든 화랑도 성원간의 우정관계나 단체의식이 매우 강했던 것은 틀림없다.
화랑도는 독특한 무사도(武士道)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화랑들의 전기를 보면, 당시에 화랑뿐 아니라 낭도나 일반 병졸에 이르기까지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무엇보다도 전사(戰死)를 명예로 여기는 무사도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무사도는 특히 화랑출신의 장군들이 모범을 보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년) 백제를 치기 위한 원정군의 주요한 장수는 김유신을 비롯해 그의 아우인 흠순(欽純, 또는 欽春)과 품일(品日) 등이었다. 황산(黃山)벌판의 싸움에서 품일과 김흠순은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해 각기 아들인 화랑 관창(官昌)과 반굴(盤屈)을 전사하게 한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화이다. 한편, 김유신은 672년(문무왕 12년)에 그의 아들 원술(元述)이 석문전투(石門戰鬪:황해도 서흥)에서 당나라군과 싸워 패하고 돌아오자, 왕명을 욕되게 하고 가훈(家訓)을 저버렸다는 이유로 그를 죽일 것을 왕에게 탄원한 적도 있다. 비록 원술은 왕의 비호로 목숨을 구했으나 감히 아버지를 볼 수 없었으며, 아버지가 죽은 뒤에 어머니를 만나려 했으나 끝내 어머니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화랑도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래와 춤이었다. 본래 노래가 정신교육에, 특히 청소년의 의기를 북돋우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점에서 화랑도는 다른 민족의 청소년집단이나 전사조직과 마찬가지로 가무(歌舞)조합으로서의 일면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화랑도는 삼국항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한 진흥왕 때 제정되어 삼국통일을 이룩할 때까지 한 세기 동안에 활기를 띠었다. 화랑도는 이 시기에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역사가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郎世紀)≫에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한 것은 이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1백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 전쟁상태에 돌입해 있던 신라의 국가적 위기에 화랑도는 전사단으로서 크게 이바지하였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