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숙주의 갈라진 운명
■ 신숙주의 갈라진 운명
"성삼문과 신숙주는 나이도 비슷하고 같은 시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매우 친한 사이였으나, 둘의 인생 역정은 크게 엇갈리게 된다. 집현전 출신 젊은 학자들의 리더였던 성삼문은 충청도 홍성 출신으로, 오위도총부 총관(정2품) ‘성승’의 아들이고 안평대군(세종의 셋째아들)과 동갑이었다. 신숙주는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대제학을 지낸 신장의 아들로 수양대군(세종의 둘째아들)과 동갑으로 둘 다 세종에게는 아들 뻘이었다.
",둘은 집현전에서 함께 일하는 동지로서 훈민정음 창제에도 깊이 간여했다. 단종1년(1453년)10월 수양대군이 주도한 계유정난이 일어났 때, 신숙주는 도승지, 성삼문은 동부승지였다.
계유정난 후 신숙주는 2등 공신에, 성삼문은 3등 공신에 끼여 있었다. 성삼문이 공신에 낀 것은 집현전에서 영향력이 큰 성삼문에 대한 회유책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던 계획이 실패한 후, 성삼문은 국문(鞫問)을 받는 대역 죄인이 되었고, 신숙주는 병조판서로서 국문(鞫問)자의 입장이 되었다. 사육신은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지고 효수(梟首)되었으며, 신숙주는 역모를 잘 다스린 공으로 우찬성이 되었다. 죄인들이 처형된 후 남은 가족들 중 여자들은 노비가 되어 공신들의 집에 나뉘어졌다. 신숙주는 죽은 자들의 부인과 딸들을 차지하게 되었다.
사실 신숙주는 뛰어난 언어학자이자 외교관이었으며, 다섯 임금을 모시고 20년이나 재상 노릇을 한 인재였다. 어학에 능해 일본, 중국과의 외교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고, 주요 외교문서들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쳐야했다.
신숙주 하면 연상되는 것이 바로 숙주나물이다.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났을 때 절의를 지키지 않고 변절했다하여 녹두를 콩나물처럼 키워서 만든 녹두나물이 잘 상한다하여 변절자(變節者) 신숙주의 이름을 따서 ‘숙주나물’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단종복위운동’이후 바로 붙여진 것이 아니라, 200여 년이 지난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명에 대한 절의를 지켜야 한다는 풍조가 확산되면서 성삼문을 절의의 상징으로 내세운 반면, 신숙주는 변절의 상징이 된 것이다.
신숙주에 대한 일화가 또 하나 있다. 사육신이 모두 처형되는 날, 신숙주의 부인은 멀쩡하게 살아 돌아오는 신숙주에게 “어찌 살아 돌아왔느냐” 며 창피해서 못 살겠다고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신숙주의 부인은 사육신의 옥사가 있기 이미 5개월 전에 병사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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