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5편
■ 안사람의병대 대장 윤희순 5편
윤희순은 조선에서 날아드는 편지를 읽을 줄 아는 동포가 드물다는 점을 안타까이 여겨 1912년 만주 환인현에 ‘노학당(老學堂)’을 설립했다. 아마도 이곳에 학교를 세워 항일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듯하다. 윤희순이 교장인 이 학교에는 독립투사들이 세운 동창학교 선생들이 와서 국어·산수·역사를 가르쳤다. 50여 명의 항일운동가를 배출했으나 3년 뒤 일제에 의해 폐교되고, 노학당 자리에는 옥수수밭이 들어섰다. 노학당 시절 윤희순은 정신적 지주를 잃었다. 1913년 12월 시아버지 유홍석이 7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15년 윤희순은 탄광촌인 무순시 포가둔으로 이사를 갔다. 여기에서 그녀는 중국인들에게 항일투쟁을 연대하자고 꾸준히 설득했다. 그녀의 제안으로 실제로 항일운동에 가담한 중국인이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1915년에는 남편 유제원과 재종 시숙이자 집안의 버팀목인 유인석 의병장이 잇따라 타계했다. 이런 죽음 속에서도 55세의 윤희순은 더욱 강해졌다.
1920년 만주에서 김좌진·홍범도 장군에게 대패한 일본군이 간도의 조선인을 무차별 살상하는 간도참변이 일어났다. 이때 윤희순은 위축된 독립운동을 되살리기 위해 그녀의 아들들과 함께 한·중 애국지사 180명을 찾아다니면서 규합 활동을 벌인 끝에 ‘조선독립단’을 결성했다. 조선독립단 단장은 윤희순, 유돈상, 음성국(유돈상의 장인)이었다. 조선독립단에는 이들의 가족, 친척이 모두 참여했다. 이른바 ‘윤희순 가족부대’로,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사격연습을 하며 게릴라 활동을 펼치는 항일투쟁 패밀리였다.
큰아들 유돈상, 둘째 아들 유교상, 조카 유휘상, 며느리 원주 한씨가 주전 멤버였다. 교상은 어린 시절 문서를 전하려고 말을 타고 달리다 떨어져 다리를 절었지만, 그에 아랑곳 않고 전투에 참가했다. 돈상의 아들은 굴렁쇠를 굴리고 다니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독립운동 연락책 노릇을 했다고 한다. 또 돈상은 ‘조선독립단 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1932년 ‘조선독립단’에 중요한 기회가 찾아왔다.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과 연합작전을 펼치기로 한 것이다. 9월 15일 무순을 지나는 일본군 철도 운수선을 습격하는 일이었다. 윤희순은 말이 먹을 풀과 군인 식사를 제공하는 일 그리고 부상자를 치료하는 일을 맡았다. 이때 윤희순의 나이 72세였다. 하지만, 무순 함락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이튿날 일제는 3000명이 넘는 조선인과 중국인을 대량 학살했다. 윤희순은 눈물을 머금고 봉성현 석성으로 주소를 옮겼다.
석성에서 윤희순은 둘째 손자(유돈상의 둘째 아들)를 보았다. 기쁨도 잠시. 1934년 첩첩산중에 일본군이 들이닥쳐 마을에 불을 질렀다. 남자들은 대부분 외출하고 여자들밖에 없는 마을이었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