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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30일 토요일

오두미배요五斗米拜腰 - 다섯 말의 쌀, 얼마 안 되는 봉급

오두미배요五斗米拜腰 - 다섯 말의 쌀, 얼마 안 되는 봉급

오두미배요(五斗米拜腰) - 다섯 말의 쌀, 얼마 안 되는 봉급

다섯 오(二/2) 말 두(斗/0) 쌀 미(米/1) 절 배(手/5) 허리 요(肉/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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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말의 쌀(五斗米)이라 하면 五斗米教(오두미교)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중국 後漢(후한) 말기에 나타난 道敎(도교)의 일파로 처음 들어갈 때 다섯 말의 쌀을 바치게 했기 때문에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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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陶淵明(도연명)이 그까짓 다섯 말의 녹봉 때문에 지방관을 허리 굽혀 맞이할 수 없다고 내팽개친 일을 더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여기에서 다섯 말의 쌀이라 하면 얼마 안 되는 봉급을 이르는 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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字(자)인 도연명으로 더 잘 알려진 陶潛(도잠, 365~427)은 東晋(동진) 말기에 태어난 六朝(육조)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40여 년간 고위직을 지낸 陶侃(도간, 侃은 강직할 간)의 증손으로 떵떵거릴 집안이었지만 도연명은 하위직을 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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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가난한 생활을 하며 술을 좋아했고,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놓아 五柳先生(오류선생)이라 불렸다. 벼슬을 하면서도 항상 전원생활을 꿈꾸며 녹봉 때문에 상관에게 허리 굽히는 일을 괴로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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彭澤(팽택)이란 고을에서 현령을 하고 있을 때 상급기관인 주지사가 순찰관을 보냈다. 고을 아전들이 의관을 갖추고 정중히 맞이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그러자 도연명은 ‘내 어찌 다섯 말의 쌀 때문에 허리를 꺾고 시골의 어린 아이에게 절을 할 수 있겠는가(我不能爲五斗米 折腰向鄕里小兒/ 아불능위오두미 절요향향리소아)’하며 거절했다. 그러면서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사임한 뒤 다시는 관계에 나가지 않았다. 李延壽(이연수)가 편찬한 ‘南史(남사)’를 비롯하여 ‘宋書(송서)’, ‘晉書(진서)’의 열전에 두루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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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꼬운 일을 견디지 못하고 관직을 내팽개친 쌀 다섯 말의 기개는 후세의 시인들이 많이 본받아 折腰(절요), 五斗折腰(오두절요), 爲米折腰(위미절요) 등 여러 형태로 변형돼 노래했다. 사표는 신중히 생각하고 낼 일이지만 일자리가 부족하고 伏地不動(복지부동)이 만연한 관가에선 이런 호기가 옛날 남의 일일 수밖에 없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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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8일 금요일

오두미배요五斗米拜腰 - 다섯 말의 쌀, 얼마 안 되는 봉급

오두미배요五斗米拜腰 - 다섯 말의 쌀, 얼마 안 되는 봉급

오두미배요(五斗米拜腰) - 다섯 말의 쌀, 얼마 안 되는 봉급

다섯 오(二/2) 말 두(斗/0) 쌀 미(米/1) 절 배(手/5) 허리 요(肉/9)

다섯 말의 쌀(五斗米)이라 하면 五斗米教(오두미교)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중국 後漢(후한) 말기에 나타난 道敎(도교)의 일파로 처음 들어갈 때 다섯 말의 쌀을 바치게 했기 때문에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陶淵明(도연명)이 그까짓 다섯 말의 녹봉 때문에 지방관을 허리 굽혀 맞이할 수 없다고 내팽개친 일을 더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여기에서 다섯 말의 쌀이라 하면 얼마 안 되는 봉급을 이르는 말이 됐다.

字(자)인 도연명으로 더 잘 알려진 陶潛(도잠, 365~427)은 東晋(동진) 말기에 태어난 六朝(육조)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40여 년간 고위직을 지낸 陶侃(도간, 侃은 강직할 간)의 증손으로 떵떵거릴 집안이었지만 도연명은 하위직을 전전했다. 항상 가난한 생활을 하며 술을 좋아했고,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놓아 五柳先生(오류선생)이라 불렸다. 벼슬을 하면서도 항상 전원생활을 꿈꾸며 녹봉 때문에 상관에게 허리 굽히는 일을 괴로워했다.

彭澤(팽택)이란 고을에서 현령을 하고 있을 때 상급기관인 주지사가 순찰관을 보냈다. 고을 아전들이 의관을 갖추고 정중히 맞이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그러자 도연명은 ‘내 어찌 다섯 말의 쌀 때문에 허리를 꺾고 시골의 어린 아이에게 절을 할 수 있겠는가(我不能爲五斗米 折腰向鄕里小兒/ 아불능위오두미 절요향향리소아)’하며 거절했다. 그러면서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사임한 뒤 다시는 관계에 나가지 않았다. 李延壽(이연수)가 편찬한 ‘南史(남사)’를 비롯하여 ‘宋書(송서)’, ‘晉書(진서)’의 열전에 두루 실려 있다.

아니꼬운 일을 견디지 못하고 관직을 내팽개친 쌀 다섯 말의 기개는 후세의 시인들이 많이 본받아 折腰(절요), 五斗折腰(오두절요), 爲米折腰(위미절요) 등 여러 형태로 변형돼 노래했다. 사표는 신중히 생각하고 낼 일이지만 일자리가 부족하고 伏地不動(복지부동)이 만연한 관가에선 이런 호기가 옛날 남의 일일 수밖에 없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