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류시인 이옥봉 1편
■ 여류시인 이옥봉 1편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이라면 황진이, 허난설헌, 신사임당을 말한다. 그 중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은 한시(漢詩)를 썼고, 황진이는 시조(時調)를 지었다. 그런데 이옥봉이라는 시인을 조선 3대 여류시인의 한 사람으로 꼽는 사람도 있다. 이는 이옥봉이 한시를 썼기 때문에 시조를 지은 황진이 대신 허난설헌, 신사임당, 이옥봉 세 사람을 조선 3대 여류시인으로 꼽는 것이다. 물론 시조도 운문이기 때문에 시와 같은 장르에 포함시키기는 하지만, 한시와 시조는 형식 자체가 엄연히 다르다. 따라서 이옥봉을 조선 3대 여류시인으로 지칭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조선 시대 여류시인은 한결같이 주옥같은 시와 명문장을 남겼지만, 신분이나 여성이라는 차별적인 상황으로 내밀한 사적 생애의 자취는 많이 가려져 있다. 이중 이옥봉은 특히나 불행하고 비극적인 생을 살다 간 여성으로 평가받으면서도, 우리에게 가장 낯선 인물일 만큼 생년(生年)과 졸년(卒年)이 불분명하고 생애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가혹한 가부장제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그녀의 천부적 재능은 저주받은 축복이자 삶을 옥죄는 형벌이었던 셈이다.
서녀(庶女)로 태어나 스스로 소실(小室:첩)의 삶을 택했던 옥봉은 결국 자신이 쓴 한 편의 시로 인해 사랑하는 남편에게서조차 버림받은 채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미천한 출신 성분으로 인해 우리들에게 다소 생소한 인물이지만, 그녀가 지은 한시를 읽어보면 비범(非凡)한 시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옥봉의 시는 조선보다는 오히려 중국과 일본에서 더 알려지게 되었다.
이옥봉의 아버지는 이봉으로 양녕대군의 고손자(高孫子)였다. 이봉은 유성룡, 정철, 이항복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문장가였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으로 조헌 등과 함께 싸운 인물이다. 이옥봉은 이봉의 서녀로 본래 이름은 숙원, 또는 원이었다. 옥봉은 그녀가 직접 붙인 호(號)이다. 이봉은 영특한 딸을 애지중지하며 길렀다. 점차 자라면서 장안의 명사들과 어울리며 뛰어난 시를 읊어 유명 인사가 되었다.
옥봉은 자신이 서녀의 신분이었기에 정식 중매를 넣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뛰어난 문장력을 가진 이옥봉은 배필로도 뛰어난 문장가를 맞이하고 싶었다. 학식과 인품이 곧은 명문가 자제이자 진사 시험에 장원급제한 ‘조원’이란 인물을 사모해 스스로 소실이 되기를 청했다. 이에 부친 이봉은 친히 조원을 찾아가 딸을 소실로 받아줄 것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조원의 장인인 판서대감 이준민(李俊民)을 찾아가 담판하고 비로소 받아들여졌다. 조원은 첩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앞으로는 함부로 시를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했다. 아내가 시를 짓는 것은 남편 체면을 깎아내린다는 이유였다. 전형적인 남존여비 사상의 극치였다. 옥봉은 사랑을 위해 절필(絶筆)을 약속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