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류시인 이옥봉 3편
■ 여류시인 이옥봉 3편
이 ‘탄원서 사건’을 알게 된 조원은 옥봉을 불러 크게 꾸짖고, 아녀자가 허락도 없이 함부로 약속을 깨고 글을 썼다하여 친정으로 쫓아내 버렸다.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버림받고 쓰고 싶은 시도 마음껏 쓰지 못하게 된 그녀에게 삶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임란 직전 남편으로부터 내쳐진 이후로는 종적마저 묘연해진다. 언제 어떻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실학자 지봉 이수광(芝峰 李睟光:1563~1628)이 지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 흥미로운 기록이 전한다.
『조원의 아들인 승지 조희일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로대신으로부터 시집 한 권을 받는다. 놀랍게도 이옥봉 시집이었다. 옥봉은 부친 조원의 첩으로 대신이 들려준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40여년 전 바닷가에 괴이한 주검이 떠돌아 사람을 시켜 건져 올리도록 했다. 주검은 종이로 수백 겹 말려 있었고, 안쪽 종이엔 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시가 빼어나 책으로 엮었다. 말미엔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 기록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불확실하다는 견해이다. 하지만, 이수광은 전주 이씨 집안으로 옥봉과 동 시대의 인물이며, 당시 옥봉의 문재(文才)는 시중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중국을 다녀온 조원의 아들을 통해 이 비극적인 사연을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삶의 희망을 잃은 옥봉은 창호지에 빽빽하게 쓴 시 두루마리를 온몸에 칭칭 동아줄로 감은 채 바다에 몸을 던졌고, 그 시신이 조류에 밀려 중국의 해안가에서 발견된다. 그때 중국의 원로대신들이 옥봉의 시를 보고 감탄한 나머지 그 시들을 모아 한 권의 시집으로 만들었고, 그 시집이 중국에 갔던 조선의 사신들에게 전해져 조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숙종 30년에 간행된 시문집 《가림세고(嘉林世稿)》 부록에 《옥봉집》으로 그 작품이 실려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사라질 뻔 했던 이옥봉의 시 32편이 조선에 다시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시 중에는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싸웠던 신립에게 보낸 시도 있다. 신립이 함경도에서 여진에게 승리한 뒤에 보낸 것이라 알려져 있다.
『장군의 호령은 번개 바람처럼 급한데
수많은 수급 내걸리니 그 기세 웅장해라.
북소리 울려 퍼지는 곳에 쇠피리 소리도 나니
달은 푸른 바다에 잠기고 어룡이 춤추네.』
이런 시를 쓴 때문인지, 허균은 이옥봉의 시를 가리켜 맑고 장엄하여 아녀자의 연약한 분위기가 없다고 평했고, 홍만종도 이옥봉이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