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독립운동가 3편
■ 여성독립운동가 3편
또 한분, 잊어서는 안될 분은 바로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여사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에게 어머니는 “당당히 죽으라.”고 한다. 그리고 새하얀 수의를 손수 지어 보냈다. 가히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답다. 조마리아여사는 안중근처럼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뒷바라지했다. 독립운동가들은 조마리아의 집에서 먹고 자고 간호를 받기도 했다. 조마리아여사는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여사와 한 집에 살며 독립운동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일제는 조선이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도록 돈을 빌려 주었는데, 때문에 조선이 일제에 갚아야 할 돈은 1906년까지 무려 1,300만 원에 달했다.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3,900억 원 정도이다. 사람들은 함께 돈을 모아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펼쳤는데, 조마리아는 이때 은가락지 2쌍, 은노리개 2개, 은장도 1개 등 적지 않은 패물을 내놓았다. 국채보상운동 말고도 조마리아가 독립을 위해 자금을 모았던 기록은 많이 남아 있다.
\남도의 유관순\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윤형숙 열사도 3·1운동 당시 만세 운동에 앞장섰던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00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난 윤형숙 열사는 열여덟 살에 광주 지역 최초의 여성 중등교육기관인 수피아여학교에 진학했다. 윤 열사는 리더십이 강해 반장을 도맡으며 학교에서 민족의식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다 2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국내 곳곳에서 항일운동의 바람이 거세게 일어나자, 광주에서도 3월 10일 만세 운동이 일어나, 광주·전남 지방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윤형숙 열사는 학생들을 비롯해 군중 1000여 명을 이끌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는데, 일본군은 기마 헌병을 투입해 총칼을 휘두르며 만세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때 윤형숙 열사가 태극기를 든 한쪽 팔이 잘리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윤 열사는 반대편 손으로 다시 태극기를 집어 들고 만세를 불렀고, 결국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했다. 함께 시위에 나선 수피아여학교 교사와 학생 20여 명도 잡혀갔다.
그 후 윤형숙 열사는 만세 운동의 주동자로 감옥에 있는 동안 갖은 고문으로 오른쪽 눈이 실명되는 고통도 겪어야 했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는 고향 여수의 기독교학교에서 일하는 등 학생 교육에 힘쓰다 광복을 맞이하게 됐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윤 열사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해 9월 기독교 전도사라는 이유로 북한 인민군에게 붙잡혀 총살을 당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윤형숙 열사의 삶은 사후(死後) 54년 만에 다시 재조명되어 알려지면서 2004년 정부는 윤형숙 열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