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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4일 목요일

연산군과 무오사화 1편

■ 연산군과 무오사화 1편

■ 연산군과 무오사화 1편

조선 시대에는 모두 네 차례의 사화가 발생했다. 연산군 4년인 1498년의 무오사화, 연산군 10년(1504년)의 갑자사화, 중종 14년(1519년)의 기묘사화, 명종 즉위년(1545년)의 을사사화가 그것이다. 사림(士林) 세력이 화를 입었다는 뜻에서 ‘사화(士禍)’라고 부른다. 다만 무오사화는 사초(史草)가 원인이 되었다고 해서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태종에서 세조대에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조선의 국가 체제는 성종 대에 이르러 완성단계에 들어갔다. 《경국대전》의 반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의 실시 등 법제가 완성되고, 유학이 일어나면서 유교문화가 융성했다. 1469년 왕위에 오른 성종은 세조 이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수렴청정을 끝내고 1476년(성종7년) 친정을 시작하면서 신진 사림세력들을 대거 등용했는데, 이로부터 정치·경제·사상 등 여러 면에 걸쳐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갈등이 깊어갔다.

훈구세력은 예종과 성종 초반에 걸친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憙王后)의 수렴청정기간 동안 남이(南怡), 구성군 준(龜城君浚) 등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과 경제력을 장악하고, 벌족(閥族)을 이루면서 적폐의 무리가 되어있었다. 한편 길재(吉再)로부터 학문적 계통을 이어받은 사림파는 경제적으로 지방의 중소지주적 기반을 지니고 있으면서 훈구파의 대토지사유화를 시정하려고 했다. 또한 이들은 사상적으로 경학(經學)에 충실하고, 기본정신을 성리학에서 찾고 있었다.

성리학적 질서로 향촌을 정리하고 나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이 같은 사림세력의 정치·경제·사상적 지향은 성종의 왕권강화 노력과 결합되면서 김종직을 필두로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의 사림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림파가 급속히 성장하자,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은 이에 위협을 느끼고 사림파에 대한 숙청을 꾀하게 되었다. 그 갈등이 처음으로 폭발한 것이 1498년의 무오사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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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는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당시의 집권세력인 유자광·이극돈·윤필상 등을 비판했다. 김종직은 남이의 옥사가 유자광의 무고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김일손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고 세조의 실정을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이목은 윤필상을 불교숭상을 주장하는 간귀(奸鬼)로 지목하며 탄핵했다. 사림을 중용한 성종의 재위기간 동안에는 효과적인 반격을 하지 못했던 훈구파는 연산군의 즉위를 계기로 중앙정계에서 사림세력을 제거하고자 본격적으로 칼을 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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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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