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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4일 목요일

연산군과 무오사화 2편

■ 연산군과 무오사화 2편

■ 연산군과 무오사화 2편

사화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것은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이었던 제자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었다. 《조의제문》이란 \의제를 애도하는 글\이란 의미로 김종직이 생전에 꾼 꿈에 대해 쓴 글이었다. 꿈에 신(神)이 나타나서 "나는 초나라 회왕 손심(의제)인데 서초패왕 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에 잠겼다." 라고 말하곤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한다. 이 꿈을 꾼 후 김종직은 글을 지어 의제를 조문했는데, 그 글이 《조의제문》이다. 1498년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실록청의 당상관으로 임명된 이극돈은 ‘조의제문’이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즉위한 것을 빗댄 것으로 세조를 비방하는 내용이라고 유자광에게 알렸다.

유자광은 노사신·한치형·윤필상·신수근 등을 포함해서 당시 사림파로부터 탄핵을 받고 있던 외척과 함께 김종직과 김일손 일파를 연산군에게 고변(告變)했다. 무오사화의 발생과 전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신하는 단연 유자광이었다(물론 최종적이며 최대의 결정권을 행사한 사람은 국왕인 연산군이었다). 일찍이 성종 때 유자광은 김종직과 묵은 원한이 있었는데, 이극돈(李克墩)이 김일손의 사초와 관련된 문제를 상의하자, 누구보다도 민첩하게 사건의 확대를 주도했다.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은 유자광이 남이(南怡)를 무고(誣告)로 죽인 자라 하여 멸시하였다. 함양 군수 시절에 함양군의 한 정자에 걸려있던 현판을 간신이 쓴 현판이라 하여 떼어내어 불사른 적이 있었는데, 이 현판의 주인공이 바로 유자광이었다. 평소 서자(庶子)라 하여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고, 김종직에 대한 원한을 갖고 있었던 유자광은 이 일로 단단히 복수를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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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의 발고로 절대로 사초를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규정을 어기고, 훈구대신들은 김일손이 기록한 사초를 발췌하여 연산군에게 바쳤다.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 조의제문을 검토하던 연산군은 분기탱천하였다. 세조가 과부가 된 자기 며느리 귀인 권씨를 범하려 했다는 소문이 사실인 양 기록되어 있었고, 단종의 시신을 산 속에 넣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 쪼아 먹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산군은 원래 사림파의 간언(諫言)과 권학(勸學)에 증오를 느끼고 학자와 문인들을 경원(敬遠)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방종과 사치 행각에 추종하는 자를 좋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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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받은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의 제자들을 모조리 잡아 보름동안이나 직접 국문을 시작했다. 연산군은 이런 불충한 사초를 쓴 까닭을 날카롭게 추궁했다. “이것은 반심(反心)을 품은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너는 세조의 후손이 다스리고 있는 조정에서 벼슬했는가?” 김일손은 반역의 혐의를 부인하면서 문제된 내용은 이런저런 사람들에게서 들었거나 자신의 소박한 판단에 따라 작성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7월 12일부터 26일까지 신문한 끝에 이 사건은 모두 김종직이 교사한 것이라 결론지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