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산군과 무오사화 3편
■ 연산군과 무오사화 3편
거듭되는 고문에 칡넝쿨 얽히듯 연루자가 불어났다. 김종직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지만, 김종직을 대역의 우두머리로 간주하여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는 형(부관참시:剖棺斬屍)을 내리고, 생전에 지은 그의 많은 저서들을 불살라버렸다. 김일손·이목·허반·권오복·권경유 등은 세조를 욕보였다는 죄목으로 능지처사에 삼족(三族)이 처형을 당했다.
그리고 표연말·홍한·정여창·이주·김굉필·이계맹·강혼 등은 〈조의제문〉의 내용에 동조했거나 김종직의 문하생으로서 당을 이루어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는 죄로 곤장을 맞고 귀양을 보냈다. 또한 김종직의 관작만을 빼앗자고 주청한 대간(臺諫)들도 모두 죄를 주었고, 이극돈·유순 등은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알리지 않았다고 하여 벼슬에서 쫓겨났다.
이로써 성종 때 대거 진출했던 사림은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등 커다란 타격을 받고 중앙정계에서 물러나 씨가 말라버렸고, 귀찮고 말 많던 사림들을 싹쓸이하고 난 연산군은 신하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절대 권력자로 부상했다. 이 무오사화를 주도한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 등 훈신들은 논밭과 노비 등을 상으로 받고 그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이 옥사(獄事)의 주모자 가운데서도 유자광은 권력의 정상에 오르면서 위세를 떨쳤고, 연산군의 폭정과 훈구파의 득세로 조정의 분위기도 크게 경색되었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4년 7월 1일에 시작되었다.
『파평부원군 윤필상(尹弼商), 선성부원군 노사신, 우의정 한치형(韓致亨), 무령군 유자광이 비밀스러운 일을 아뢰기를 청하고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에게 출입을 관장케 하니 사관은 참여할 수 없었다. ……곧 의금부 경력 홍사호(洪士灝)와 도사 신극성(愼克成)이 경상도로 급파되었는데, 외부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다.』
이 기록이 보여주듯이 사화는 소수의 대신들이 비밀리에 보고하고 국왕이 재가하면서 급작스럽게 발발했다. 이렇게 시작된 사화는 같은 달 27일 주요 연루자들의 처벌 내용을 확정해 전교(傳敎- 임금이 명령을 내림)함으로써 일단락되기까지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으며, 본격적인 추국이 시작된 시점부터 계산하면 20일도 되지 않았다. 즉 돌발적으로 일어나 매우 짧은 기간 안에 전격적으로 마무리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무오사화가 상당히 목표를 가진 정치적 숙청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무오사화는 사림 세력의 정치적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훈구세력이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정치적 사건이라는 성격을 띤다. 무오사화 이후 정국의 주도권은 훈구세력에게로 넘어갔지만, 6년 뒤 조정에는 다시 한 번 피바람이 불어 닥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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