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엿장수 독립운동가 정남국 2편
■ 엿장수 독립운동가 정남국 2편
1926년 일제는 소안면민들이 스스로 힘을 모아 만든 사립소안학교를 강제로 폐교시켜 공립학교로 개편하려고 하였다. 7월 13일 그는 공립학교 개편에 반대하는 면민대회에서 사회를 맡아 진행하였다. 그리고 전남도청을 방문하여 항의하였으나, 성과는 없었다. 선생은 그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5월 10일 일본 오사카에서 ‘완도향우회’와 ‘동경향우회’가 힘을 합해 재 일본노동총동맹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사립소안학교를 강제 폐쇄하는 총독부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실정반대실행위원회’를 조직하고 규탄대회를 개최하였다. 1927년 6월 재일조선노동총동맹위원장으로 추대 받고 오사카 항구에서 4개 단체 회원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합동대회를 열었다. 축사를 하는 도중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대회는 무산되고, 선생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렀다.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당시 전라도는 총독부에서 일본이 만든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에게 국유지(國有地)를 불하(拂下)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은 이번에는 농민운동을 하기로 작심한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들이 총독부로부터 불하받은 땅은 원래 현지에서 농민들이 경작하고 있던 농토였다. 당연히 현지 농민들은 자기가 벌어먹고 사는 땅이었기 때문에 자기 땅으로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땅으로 등기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국유지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농민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농토를 잃고 소작인이 되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게다가 일본인들은 소작료를 터무니없이 높게 받았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완도를 비롯한 신안의 섬 지역과 영광, 무안, 해남등지였다.
이때부터 시작된 전라도의 소작쟁의(小作爭議)는 결국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선생은 소안도에서 토지반환소송에 승소했던 경험을 살려 다른 지역의 농민들을 선동하였다. 대표적인 소작 쟁의로는 1923년의 암태도 소작쟁의가 있고 다음으로 하의3도를 시작으로 영광, 해남등지에서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이 농민운동에 불을 붙여준 사람이 바로 정남국선생이다. 청산도 출신 김흥곤은 광주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신안으로 내려가 소작쟁의를 취재하여 전국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해방 이후 선생은 1951년 5월 31일 실시한 국회의원선거에서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항일운동으로 체포되어 수많은 고문과 감옥살이로 병들고 허약해진 선생은 4년 임기가 끝나고 바로 여수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하던 중 1955년 6월 19일 타계하였다.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애국장(제83호)이 추서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