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와 사도세자 3편
■ 영조와 사도세자 3편
영조는 신하들의 형식적 반대 의례를 거친 후 재위 25년에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1749년 1월 27일 영조는 왕세자의 대리청정을 종묘에 고하고, 이후 결정할 일이 있으면 자신에게 아뢸 것을 지시했다. 영조는 정무와 거리가 먼 세자의 기질을 사전 훈련으로 조정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지만, 실제론 영조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있었다.
대리청정 기간 동안 사도세자는 격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하는 모든 일처리에 불만을 표시했고, 양위(讓位:왕위를 물려줌) 파동까지 일으켰다. 사도세자는 추운 겨울날 문밖에 나가 거적자리를 깔아놓고 엎드려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며 용서를 빌기도 했다.
1752년 양위 파동의 홍역을 치른 후에,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무마되는 듯 했다. 하지만 1756년 2월 16일 영조는 사도세자가 비록 비답(批答)을 내리더라도, 바로 반포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대리청정을 명했으면서도 실제 주요한 안건은 자신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뜻이었다. 날이 갈수록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세자는 1756년 11월 천연두 증세로 고생하기도 했다. 영조와 세자는 세자가 대리청정으로 정무에 직접 관여하면서 더욱 멀어졌다.
영조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세자에게 기본적인 지침을 하달했다.
“여러 신하들이 일을 아뢴다고 하여 ‘그렇게 하라(依爲之)’고 하면 반드시 잘못을 저지를 우려가 있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에게 묻고 자신의 의견을 참작한 뒤에 결정하라.”
대리청정의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이때 사도세자는 여당인 노론보다 야당인 소론을 더 많이 챙겼다. 노론의 입장에서는 이 기회에 사도세자를 떠보기도 하고 회유해보기도 하면서 사도세자의 심중을 떠보았다. 하지만 노론의 지나친 세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세자는 노론 편에 서지 않았고, 당황한 노론은 세자를 제거할 작전에 들어갔다.
영조에게 세자의 동향(動向)을 과장해서 보고하는 등 부자간을 이간질하였다. 영조는 아들의 정무적 능력과 수신(修身)에 더욱 불만을 갖게 되었고, 그런 불만은 양위 파동을 계기로 집약되어 폭발했다.
기본적으로 양위(讓位) 파동은 대단히 소모적인 행위였다. 국왕이 실제로 그럴 의사가 전혀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세자와 신하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양위를 만류해야 했고, 국왕은 의사를 관철하겠다고 고집하는 것이다. 이런 실랑이를 몇 차례씩 거친 뒤에야 어명은 마지못해 거둬지는데, 그 과정에서 충성(忠誠)은 검증되고 불충(不忠)은 적발되며, 왕권은 공고해지고 이런저런 정치적 전환이 이뤄지게 된다.
영조도 선왕들처럼 신하들을 제압하거나 정국을 전환하는 방법의 하나로 양위 파동을 사용했다. 영조는 대리청정을 시작하기 전까지 이미 5회의 양위 의사를 밝혔고, 그 때 세자의 나이는 각각 4, 5, 9, 10, 14세였다. 10살도 되지 않은 세자에게 양위하겠다는 영조의 지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어린 세자는 양위 파동 때마다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 철회를 애원해야만 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