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와 사도세자 7편
■ 영조와 사도세자 7편
나경언이 올린 봉서를 보고 불같이 화간 난 영조는 나경언을 취조하여 고변(告變)의 근거를 확실히 알아보아야 한다는 한익모의 간언을 물리치고, 세자의 대질 요청도 뿌리친 채 꾸짖음으로 일관했다. 그리고는 궁궐의 경비를 강화하고 세자궁으로 통하는 문을 폐쇄했으며, 당장 세자가 동원할 수 있는 군사의 수도 줄여버렸다.
억울함을 못 이긴 세자가 울부짖으며 무죄를 항변했으나 영조는 세자를 내쳤다. 예상은 했지만, 영조의 분노와 질책은 더 컸다. 세자가 후궁을 죽인 일까지 언급했으며, 세자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이제 부자는 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나경언의 고변에 영조가 좀 더 냉정하지 못하고 왜 이렇게 했는지 의문이다.
세자는 궁관에게 명하여 나경언의 배후를 캐라 명했고, 심문에 못 이긴 나경언은 배후를 분 다음 자신이 세자를 무고(誣告)했다고 자백했다. 이렇게 무고한 자가 자백했으면 세자는 혐의를 벗고 결백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나경언의 자백을 들은 소북파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나경언의 처형을 주장했으나, 영조는 도리어 앞서서 주장하는 자를 책망했다가 다음 날 다시 신하들이 강력히 주장하자 겨우 나경언을 사형에 처하도록 명했다. 그렇다고 사도세자의 역모 혐의를 풀어준 것도 아니었고, 용서한 것도 아니었다.
영조가 세자의 문안을 받지 않자, 세자는 나경언의 고변이 있은 후 아흐레째 매일 새벽 동궁의 관원들과 함께 뜰에 나와 거적을 깔고 앉아 대죄하며 영조의 명을 기다렸다. 영조는 답이 없었고, 보름이 넘자 극도의 불안에 휩싸였다. 영조의 분노와 고민은 깊어졌다. 며칠 뒤 영조는 건명문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새벽에 영의정과 우의정을 입궐케 했다. 신하들은 “요즘 세자께서 매우 뉘우치고 있사옵니다.”고 해명했지만, 영조는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여망(輿望:남은 희망)이 전혀 없다.”면서 개탄했다. 또한 영조는 신하들에게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임오화변의 근본적 원인을 부자간의 불화가 아닌 정치적 문제에 있다고 강조하고 싶은 것일 것이다. 이 비극의 책임을 자신이 아닌 신하들에게로 돌린 것이다. 한편 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임오화변이 있던 바로 그 날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는 영조를 찾아 울며 아뢰었다.
『세자의 병이 점점 깊어 바라는 것이 없사옵니다. 어미 된 정리로 차마 드리지 못할 말씀이오나 성궁(聖躬:임금의 몸을 높임말)을 보호하고 세손을 건져 종사를 편안히 하는 일이 옳으니 대처분을 하시옵소서. 다만 다 세자의 병이니 병을 어찌 책망하겠나이까. 처분은 하시되 은혜를 끼쳐 세손 모자를 편안히 하시옵소서.』
세자는 이미 영조의 노여움을 사 죽임을 당하더라도 세손만은 꼭 지키겠다는 어미의 처절한 부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록은 사실일까? 아무리 손자만은 살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더라도 자신이 낳은 아들의 죽음을 청할 어미가 어디 있겠는가?
- 8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