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창대군 1편
■ 영창대군 1편
영창대군의 이름은 이의, 제14대 선조의 열네 째 아들이다. 선조의 첫 번째 부인인 의인왕후가 후사를 보지 못하고 죽은 뒤 맞이한 두 번 째 부인 인목왕후의 아들이다. 선조는 6명의 후궁을 두어 임해군과 광해군을 비롯하여 여러 왕자와 옹주를 두고 있었으나, 정비(正妃) 소생의 적장자는 영창대군이 유일하다. 그것도 55세의 나이에 얻은 늦둥이다보니 선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은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가비상사태에 대비하여 권정례(權停例:절차를 밟지 아니하고 거행하는 의식)로 공빈 김씨(恭嬪金氏)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그 뒤 정비 소생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세자를 바꾸고 싶어했다. 방계승통에다가 서출이라는 점을 의식하던 선조는 이미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을 싫어하여 유영경 및 몇몇 신하들과 영창대군의 세자책봉을 몰래 의논하였다.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유영경(柳永慶)을 위시한 소북파(小北派)가 이 뜻을 지지하여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 일은 광해군 집권 후에 유영경 등이 처형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선조는 자신이 죽은 뒤의 사태에 대비하여 특별히 한준겸 등 7명에게 영창대군의 뒤를 부탁하였다. 이를 유교칠신(遺敎七臣)이라 부른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직 나이 어린 영창대군을 남겨두고 가는 선조의 마음이 어떠하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대목이다. 이를 간파한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들은 세자를 바꿔서는 안된다고 계속 주장하다가 사실무근한 소문을 퍼뜨린다는 죄목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귀양 출발을 차일피일 미루던 차에 선조가 갑자기 승하(1608년)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이들을 다시 등용하였다. 하지만, 광해군과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들에게 있어서 아직 영창대군은 그 존재 자체가 위험 요소였다.
그러던 중 1613년(광해군 5년) 소양강을 무대로 시주(詩酒)를 즐기던 서양갑(徐羊甲)·박응서(朴應犀) 등 7명의 서출(庶出)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이른바 ‘7서의 옥’이 일어났다. 이이첨 등은 이 기회를 이용하였다. 그들이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과 함께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역모를 도모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광해군은 이이첨ㆍ정인홍 등의 농간으로 형 임해군(臨海君)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서궁(西宮)에 잡아 가두었다.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반역죄로 몰아 서소문(西小門) 밖에서 사형에 처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