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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0일 일요일

영창대군 2편

■ 영창대군 2편

■ 영창대군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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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집권당 대북파가 장악한 삼사와 승정원 등에서는 영창대군의 처벌을 계속 상소하였다. 그러나 남인 및 일부 소북, 서인은 처벌을 반대하였고,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곽재우(郭再祐) 등은 배가 다른 이복형제이지만 계통상 모자, 형제지간의 의가 있다며 영창대군 처형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대북세력의 다수는 토역(討逆)의 논리를 내세워 죽일 것을 주장했다. 결국 이항복 등이 유배를 당하고, 대북파는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광해군의 세력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1614년 이이첨 일파가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을 시켜 악의적으로 영창대군의 방에 불을 때게 하였고 음식도 끊었다. 영창대군은 뜨거운 바닥 위에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밤낮없이 창살을 부여잡고 울부짖다가 기운이 다해 죽었고, 이이첨과 정항은 영창대군이 병으로 죽었다고 보고했다. 이때 영창대군의 나이는 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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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정항이 영창대군을 굶겨서 죽게 하였다거나 정항이 온돌을 뜨겁게 달구어 영창대군을 증살(蒸殺)했다고 되어 있으나, 《인조실록》에는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별장(別將) 이정표(李廷彪)가 음식물에 잿물을 넣어 영창대군을 죽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확실한 죽음의 경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 후 1623년 인조반정 후 관작(官爵)은 복구되었고, 이복 형 경창군의 넷째 아들 창성군을 사후양자로 지명하여 가계를 이어갔다.

시신은 1614년(광해군 6년) 경기도 광주군 남한산성 아래(현 성남시 태평3동 근처)로 운구되어 매장하였다가, 광주군의 성남시 개발지역에 포함되어 1971년 8월 경기도 안성군 일죽면 고은리(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산24-5)에 이장되었다. 이장 과정에서 묘지명(墓誌銘) 등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매몰돼 있다가, 1993년 성남시 태평3동 4911 골목길에서 도시가스 시설 배관공사 도중 다섯 조각으로 파손된 채 발견되었다. ‘영창대군묘’는 1983년 9월 19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 전주이씨 안성군 종친회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봉분 앞에 상석과 춘로석이 있고, 장대석으로 단을 쌓아 아래와 구분하였다. 아래 전방에는 동자석이 좌우에 있고 동자석 앞에는 망주석과 문석인이 좌우에 세워져 있다. 석물의 재질은 화강암이고 묘비는 대리석이다. 묘비에는 ‘영창대군증시소민공지묘(永昌大君贈諡昭愍公之墓)’라는 명문이 있다. 이수와 비신은 동체이며 쌍룡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묘단에는 직사각형 모양에 연화무늬가 새겨져 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