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창대군 3편
■ 영창대군 3편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에게는 걸림돌인 인목대비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인목대비를 처리하는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얼마 후 광해군 8년(1616년) 1월 경운궁에 광해군을 비방하는 익명서가 날아들어 왔다. 기자헌이 대비와 협력하여 유희분과 박승종을 몰아낸 다음 큰일을 도모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광해군은 조신들을 모아 놓고는 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의 폐비 상소가 제출되었으며, 이이첨과 허균(許筠)은 김개(金介) 등을 시켜 무뢰배와 거지들을 모아서 유생의 복색을 입혀 놓고, 궐문 밖에 엎드려서 대비는 역적이니 어서 폐서인하여 추방함이 옳다고 아뢰게 하는 연극을 꾸몄다.
조정에서도 한효순이 백관을 거느리고 들어가 폐모(廢母)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이첨은 모든 것을 자신이 조종하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유생들의 상소와 한효순의 정청(廷請:세자나 삼정승이 모든 벼슬아치를 거느리고 궁정에 이르러 큰일을 임금께 아뢰어 하교를 기다림)을 빙자하고 이위경(李偉卿)을 시켜 폐모 상소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문무 백관들에게 찬성 서명하기를 강요하였다. 일부는 회피하고 서명을 하지 않았고, 특히 원임대신 이원익과 기자헌(奇自獻)은 강경히 반대하였다.
또한 이항복은 신병으로 요양하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여 강경한 어조의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들 반대세력들은 계속된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마침내 이원익은 관직을 삭탈당한 뒤 남해로 귀양갔다가 수원으로 옮겨졌다. 기자헌과 이항복은 처음 정평과 용강으로 유배되었다가, 죄가 중하다하여 다시 삭주와 창성으로 가게 되었다. 그 뒤 다시 기자헌은 종성으로, 이항복은 북청으로 옮겨졌다.
철령 높은 재를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孤臣) 원루(怨淚)를 비삼아 실어다가
임 계신 구중 궁궐에 뿌려 준들 어떠리.
이 노래는 그때 오성 이항복이 북청으로 귀양가면서 지은 것이다. 이항복과 기자헌을 귀양 보낸 다음, 이이첨 등은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정창연(鄭昌衍) 등을 ‘십사(十邪)’라 하여 내몰아 정배시키고 의창군 등 20여 명도 그렇게 함으로써 반대파들을 모두 제거한 셈이다. 그리고 늙고 병들어 참여하지 못한 재상들은 모두 벼슬을 깎아버리고, 끝내 저희들 뜻대로 인목대비를 폐서인하여 경운궁으로 내몰았다. 이것을 가리켜 ‘계축사화(癸丑士禍)’ 또는 ‘계축옥사’ 라고도 한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