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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일 월요일

예종 4편

■ 예종 4편

■ 예종 4편

예종은 즉위 후 “권세가의 집에 드나드는 자가 있으면 공신을 불문하고 칼을 씌워 잡아와라”, “불법이 있다면 공신, 당상관을 가리지 말고 구금하고, 고문을 해서라도 진상을 밝혀라”는 명을 내리는 등 공신들을 장악하는 한편,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 것을 천명하였다. 아울러 몇 년 안에 기어코 부왕인 세조를 능가하는 강력한 군주가 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예종은 실제 그럴만한 재주와 배짱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종의 이러한 꿈은 미처 봉우리를 피워볼 수도 없었으니, 이는 예종이 그 전부터 앓고 있던 족질(足疾)이 원인이었다. 예종이 앓던 족질은 요즘으로 말하면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인 것 같다.

조선 8대 왕인 예종은 왕성한 의욕에도 불구하고 족질로 인하여 급격히 기력을 잃고 죽고 말았다. 재위 1년 2개월, 20세의 나이였다. 예종의 이런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서는, 겨우 족질로 그리 쉽게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이 개운치 않은 점 등을 이유로 공신세력에 대해 강경 정책을 펼친 예종에 불안을 느낀 한명회 등의 공신세력과 자기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의경세자의 부인이 독살한 것이라는 설(說)이 있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예종이 죽은 후 후계자를 결정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3명의 대상자가 있었다. 먼저, 죽은 예종의 아들인 원자(제안군)는 나이가 겨우 4살에 불과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다음으로, 예종의 형인 죽은 의경세자가 남긴 월산군과 자을산군이 있었다. 자을산군은 후계서열로는 3위이지만 결국 이 3위인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은 자을산군의 아내가 한명회의 4녀인 점도 큰 작용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후계자를 결정할 권한이 있는 대왕대비(세조의 부인)도 실질적 권세가인 한명회가 새 임금의 후원자가 되는 것이 종묘사직을 보존하는 길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열세 살에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조선 9대 임금 성종은 세종과 더불어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聖君)에 꼽힌다. 성종은 할머니(세조의 부인, 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을 거친 후에도 어머니인 인수대비의 간섭, 한명회 등 공신들의 득세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한명회를 비롯한 공신들이 하나 둘 사라지면서 유교적 정치이념을 펼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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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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