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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일 월요일

예종의 여인들 3편

■ 예종의 여인들 3편

■ 예종의 여인들 3편

왕실의 최고 어른이던 정희왕후 윤씨(세조의 부인)는 표면적으로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이 아직 너무 어리다(4살)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당시 권력의 최고 실세인 한명회의 사위 자산군을 예종의 뒤를 잇게 하려는 의지가 강했을 것이다.

1471년부터 정희왕후 윤씨(세조의 부인)가 사망하는 1483년까지 왕실에는 왕대비인 정희왕후와 2명의 대비(예종 비 안순대비, 성종 母 인수대비)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정희왕후가 왕대비로서 왕실 최고 서열인 것은 당연했지만, 서열 2위 자리를 두고 안순왕후와 현왕(現王) 성종의 생모인 인수대비 간에 세력다툼이 일어났다. 상식적으로는 실제 왕을 역임했던 예종 비 안순왕후의 서열이 더 높아야 할 것 같았지만, 왕대비의 공식 발표로 현왕(現王)인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더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472년 2월20일 <성종실록>에는 『안순왕후의 서차(序次)가 일찍이 인수왕후의 위에 있었으나, 세조가 항시 인수왕비에게 명하여 예종을 보호하게 하고 시양(侍養)이라고 일컬었으며, 또 장유(長幼)의 차례가 있으니, 그 위차(位次)는 마땅히 안순왕후의 위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안순왕후보다는 인수왕후의 서열이 높음을 공식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아들 제안대군도 왕이 되지 못한 상황에서, 안순왕후는 실제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인수왕비보다도 왕실 서열에서 밀리는 아픔을 맛본 셈이다.

안순왕후는 예종과의 사이에서 제안대군과 현숙공주를 낳았는데, 현숙공주는 연산군 때 최고의 간신 반열에 오르는 임사홍의 아들 임광재와 혼인했다. 임광재는 부마(駙馬)의 신분으로 첩을 두었다는 죄로 유배에 처해지기도 했으며, 현숙공주와는 별거생활을 했다. 짧은 왕비생활과, 그 이후 대비의 삶도 별로 순탄하지 못했던 안순왕후는 1498년(연산군 4년) 12월23일 창경궁에서 승하했다. 왕비의 무덤은 이미 조성돼 있던 예종의 창릉(昌陵) 옆에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정자각을 사이에 두고 양쪽 언덕에 능이 조성)의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생전에는 남편과 짧은 시간밖에 함께 하지 못했던 안순왕후였지만, 사후에는 예종과 영원히 함께하게 됐다.

하지만, 창릉은 화마(火魔)가 씌었는지 유난히 화재를 많이 겪었다. 인조 때 1년의 시간을 두고 2번(1625년, 1626년)이나 봉분이 타는 화재를 겪기도 했고, 영조 때에는 정자각이 불에 타서 정자각을 재건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종 때인 1896년과 1901년에도 봉분이 불에 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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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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