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명汚名을 남긴 남곤 1편
■ 오명(汚名)을 남긴 남곤 1편
‘중종의 참모’라고 하면 대부분 조광조의 이름을 먼저 떠올리지만, 조광조는 한때 중종의 총애를 받았을 뿐, 결국 중종에 의해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조광조를 제거하는 데 1등 공신이자, 영의정까지 지냈던 남곤(南袞, 1471~1527년)이야말로 진정한 중종의 핵심 참모였다.
남곤의 자는 사화(士華), 호는 지정(止亭)이요, 본관은 의령이다. 1489년(성종20년)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4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남곤이 본격적으로 관직 생활을 한 것은 연산군 시대였다. 1496년(연산군2년) 홍문관 수찬에 임명됐으며 이어 사간원 정언(正言·사간원에 속한 정6품 관직)을 지냈다. 실무에도 상당히 능한 관료였고, 특히 문장력을 인정받았다.
1504년 갑자사화 때 남곤은 서변(西邊)으로 유배됐으나,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연산군 시대의 유배는 오히려 훈장이 됐다. 1509년에는 황해도 관찰사에 올랐으며, 1511년 4월에는 대사헌이 됐다. 남곤은 뛰어난 문장력과 정치적 감각으로 중종의 신임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지내면서 미래 정승 후보로 떠올랐다.
이런 남곤의 순탄한 행보에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이 등장했으니 바로 조광조였다. 중종 10년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이 올린 상소문은 정국의 이슈가 됐다. 중종의 첫 왕비(단경왕후)로 반정 후 7일 만에 폐위된 신씨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각각 남평과 보은으로 유배됐다. 그런데 조광조가 이에 대한 부당성을 제기하면서, 박상과 김정의 유배를 묵과하면 자신이 사직을 하겠다고 청했다. 이 발언은 정치 신인 조광조의 이름 석 자를 널리 알리는 큰 계기가 됐다.
우참찬으로 있던 남곤은 조광조의 의견에 동의하며 박상과 김정의 처벌에 반대했다. 이처럼 남곤은 조광조가 정계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후 조광조가 중종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으면서 신진 세력의 리더로 급부상하자 이를 시기하여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조광조가 정국의 중심에 자리 잡으면서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다양한 개혁 정책이 진행되고, 급기야 기득권 세력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는 ‘위훈삭제’를 감행하자 남곤은 이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다.
친구인 심정을 끌어들이고 중종 즉위에 공을 세운 홍경주를 포섭했다. 이들은 중종과 잦은 면담을 통해 조광조의 전횡을 알렸으며 ‘주초위왕(走肖爲王)’으로 시작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주도하였다. 실록뿐 아니라 ‘연려실기술’ 등 거의 모든 기록에 남곤이 기묘사화의 주모자임을 적시하고 있다. “중종이 조광조와 같은 선비들을 싫어하는 기색이 있는 것을 짐작하고 꾀를 내어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는 기록에서는 조광조 제거라는 중종의 의중을 파악한 남곤이 결국 해결사로 나섰음을 보여준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