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으로 산다는 것 12편
■ 왕으로 산다는 것 12편
조총이 보급되기 전까지 활은 가장 중요한 전쟁 무기였다. 활쏘기는 조선시대 무사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무술이었으며, 무과의 주요 시험과목이었다. 조선은 태조와 세조가 활을 잘 쏘았던 전통으로 인해 세자의 교육과정에 활쏘기를 넣어 수련하였으며, 왕이 되어서도 궁궐 또는 근교에서 자주 활을 쏘았다. 문(文)을 숭상한 유학자들도 활쏘기를 권장하였는데, 활쏘기와 말타기는 유교의 권장 항목인 육예(六藝)에 속했다.
이는 덕을 기르고 유교적인 사회 질서를 확립하는 데 유용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양반들은 검술, 창술, 봉술, 권법 등은 천시하였지만 궁술은 기본 교양으로 인식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유교 문화가 확산되면서 왕의 활쏘기는 명분과 예법을 세우기 위한 교육현장으로 이용되었다. 즉 무술보다는 상하 간의 질서를 확립하는 예악(禮樂) 쪽으로 중심이 옮겨 간 것이다.
공식적인 왕의 활쏘기는 대사례(大射禮)와 연사례(燕射禮)가 있다. 대사례는 활쏘기를 통해 완력과 덕행을 살펴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고, 연사례는 궁중에서 사사로이 시행하던 활쏘기였다. 대사례는 왕이 신료들과 함께하는 최고의 활쏘기 행사였다. 현재 알려져 있는 왕의 대사례 성적은 양호한 편이다.
중종은 4발을 쏘아 3발을 맞추었고, 영조도 3발을 맞추었으며, 정조는 거의 백발백중이었다. 왕이 4발을 다 쏘고 물러나면 수행한 신하들이 짝을 지어 활쏘기 자리에 올라가 4발의 화살을 쏘았다. 신하가 쏜 화살이 과녁을 맞추면 북을 쳤고, 맞추지 못하면 징을 울렸는데, 활쏘기가 끝나면 왕은 성적에 따라 상이나 벌을 주었다.
왕이 비공식적으로 활을 쏘는 일도 많았다. 대궐 후원이나 정자에 몇몇 신하들을 모아 놓고 가볍게 필요한 시설만 간단히 준비하고 서로의 실력을 겨루었다. 또한 왕은 선왕의 능이나 온천 등을 행차하기 위해 궐 밖을 벗어날 때, 행차 도중 또는 도착지에서 신료들과 함께 활을 쏘았다. 특히 정조는 화성에 자주 행차하였는데, 화성이나 시흥에서 여러 차례 활을 쏘았다.
왕이 살아가는 동안에 훌륭한 업적을 이룩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신료들은 왕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하여 존호(尊號)를 올린다. 왕이 죽으면 그의 일생을 평가하고 공덕을 기리기 위해 시호(諡號)를 짓는다. 우선 중국에서 두 글자의 시호를 받고, 미진한 경우 신료들이 네 글자의 시호를 더 올리는 경우도 많았다.
왕의 삼년상이 끝나고 신주가 종묘에 들어가면 종묘에서 그 신주를 부르는 호칭은 묘호(廟號)이다. 묘호는 신료들이 왕의 일생을 평가하여 공이 많다고 여기면 조(祖)를 붙이고, 덕이 많다고 여기면 종(宗)을 붙여서 두 글자로 지었다. 태조. 성종. 예종. 선조. 고종 등이 모두 묘호이다. 이처럼 왕은 무수한 칭호를 갖는데 이 칭호들은 보통 붙여서 쓴다. 묘호, 중국에서 받은 시호, 존호, 신하들이 올린 시호의 순서로 쓰므로 조선의 왕들은 보통 20~30자의 호칭을 갖고 있다.
세조의 예를 보면, 묘호인 세조(世祖),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인 혜장(惠莊), 그 다음에 계유정란으로 대권을 잡은 세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올린 ‘승천체도열문영무(承天體道烈文英武)’라는 존호가 뒤따른다. 그 다음에는 신료들이 올린 시호로 ‘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가 붙었다. 그리하여 ‘세조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世祖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가 된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