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으로 산다는 것 3편
■ 왕으로 산다는 것 3편
조선시대 왕위 계승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째는 적장자(嫡長子) 계승의 원칙으로 왕비가 낳은 첫째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상속 원칙이었다. 둘째는 덕이 있는 사람이 왕이 된다는 원칙이다. 적장자에게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은 왕자들 간의 다툼을 방지하고, 후계자를 미리 교육시켜 장래를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장자가 무력하거나,
적장자보다 둘째나 셋째 아들이 유능한 경우 정국(政局)은 늘 쿠데타의 가능성으로 불안했다. 또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후궁들만 아들이 있는 경우 이들 사이의 치열한 암투로 정치 불안이 가중되었다.
조선에서 적장자가 왕위에 오른 경우는 27명의 왕 중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 7명뿐이다. 이 외에 적장자로 세자 책봉은 되었으나 왕위에 즉위하지 못한 경우도 7명이나 있었다. 세조의 큰아들 덕종, 명종의 순회세자, 인조의 소현세자, 순조의 큰아들 문조는 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세종의 아들 양녕대군이나 연산군과 광해군의 세자는 폐세자(廢世子)되었다.
반면 적장자가 아니면서 왕이 된 경우는 태조를 제외하고 19명이나 되었다. 이는 덕이 있다는 명분이거나 후궁의 아들인 경우이다. 조선의 개국 시조(始祖)인 태조는 물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과 인조, 셋째아들로 왕위에 오른 세종 그리고 임진왜란 후의 광해군 등이 그들이다.
세조와 효종 그리고 영조도 정치적 격변을 겪고 왕이 될 수 있었다. 이외에도 후궁의 아들로 왕위에 오를 경우 대부분 격렬한 궁중 암투를 겪었다. 특히 대비가 후계자로 지명한 선조나 철종은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왕이 되었기 때문에 당시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왕이 아들을 보는 것은 종사(宗嗣)가 걸린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아들을 얻기 위해 왕과 왕비는 길일을 택해 합방하고, 아들을 가지는데 좋은 음식을 가려 먹는 등 갖가지 노력을 하고, 그 결과 임신하면 왕비는 본격적으로 태교(胎敎)에 들어간다. 왕비의 만삭이 다가오면 예정일 서너 달 전에 산실청(産室廳)이 설치된다. 원자(元子)가 탄생함과 동시에 왕은 소격전(昭格殿)에 명하여 사흘간 아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왕이 몸소 소격전을 찾아와 절을 하며 첫 아들의 만복(萬福)을 기원한다. 아기의 탯줄은 어머니와 조상을 이어주는 생명의 통로로 여겨져 소중히 보관되었다. 원자가 탄생하고 사흘이나 7일째가 되면 태를 물로 씻는 의식, 즉 세태(洗胎)를 행한다. 물로 씻은 태는 항아리에 담아두었다가 명당을 골라 안장하는데, 이를 태봉(胎峰)이라 했다.
태와 함께 산실에 깔았던 고운 짚으로 만든 산(産)자리도 소중하게 보관된다. 출산 당일 권초관(捲草官)은 산자리를 붉은 줄로 묶어서 산실문 밖 위쪽에 걸어 놓아 민간의 금줄을 대신했고, 7일째에 권초관이 산자리를 붉은 보자기에 쌓아 함에 넣어 주면 내자시(內資寺:궁내의 식품·직조·연회 등을 맡은 관청)의 관리가 받아다가 권초각(捲草閣)에 보관한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