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군에게 파헤쳐진 왕릉 1편
■ 왜군에게 파헤쳐진 왕릉 1편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 국토는 황폐화되고 많은 문화재가 불타 없어진 것은 물론, 많은 포로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당시 확인된 조선의 인구 약 500만 명 중 3분의 2에 육박하는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대략 20만 명 정도가 포로로 끌려갔다. 그런데 일본은 임진왜란이 끝나자마자 사죄와 배상도 없이 화친하지 않는다면 또 다시 침략하겠다는 협박을 내세우며 국교 재개를 요구해 왔다.
그러나 전쟁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 화친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국왕 선조(宣祖)로서는 달리 대안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일본으로부터 최소한의 사죄와 배상이라도 받아내고자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의 만행과 협박이 무한 반복될 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선조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화친을 요청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전쟁에 대한 사죄 국서(國書)를 먼저 보낼 것과 함께 선릉(성종)과 정릉(중종)의 도굴범을 체포해 압송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기 휘하의 병사 중 단 한 명도 조선 침략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모든 전쟁 책임을 이미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떠넘겼다. 따라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런 사실을 공식적인 국서에 명시하고 화친을 요청한다면, 이는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쟁 책임은 있으나 이미 죽었으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쟁에 대한 사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즉, 선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책임을 시인한 것은 곧 전쟁에 대한 사죄나 마찬가지라고 해석할 수 있고, 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쟁 책임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죽었으므로 자신은 사죄할 일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선조는 이 정도의 타협으로 일본의 전쟁 책임과 사죄 문제를 매듭지으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선조 입장에서 선릉과 정릉의 도굴범 문제는 국서처럼 쉽게 타협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선릉은 성종의 능이었고 정릉은 중종의 능이었다. 그 선릉과 정릉이 임진왜란 중 도굴당해 관이 파헤쳐지고 불태워지기까지 했고, 시체는 행방이 묘연했다. 유교 가치관에서 볼 때 선왕들의 무덤과 시체를 훼손한 것은 살인보다 더한 만행이었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선조는 일본의 화친 요청에 먼저 도굴범부터 체포해 압송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선릉과 정릉은 1592년(선조 25년) 9월쯤 도굴됐다. 당시 한양은 일본군이 점령한 상황이었고, 선조는 의주에 파천(播遷)해 있었다. 그래서 조선군은 도굴 사실을 몰랐고 선조도 몰랐다. 도굴 사실이 조선군 사이에 알려진 시점은 1593년(선조 26년) 4월이었다. 1593년 2월 12일 행주대첩 이후 조선의 관군과 의병은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한양 주변에 집결했다.
의병장 김천일 역시 수도 탈환 작전에 참전하기 위해 관악산에 주둔하던 중 선릉과 정릉이 도굴됐다는 소문을 들었다. 김천일은 상부에 급보(急報)하는 한편 특공대를 조직해 현장을 조사하게 했다. 그때 선조는 평안도 영유에 머물고 있다가 급보를 받고 도굴 사실을 알게 되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