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군에게 파헤쳐진 왕릉 3편
■ 왜군에게 파헤쳐진 왕릉 3편
현장을 조사한 결과 선릉과 정릉의 광 안에는 흙색과 백색 그리고 뼈마디와 피부조각이 뒤섞인 재가 있었다. 선조는 선릉과 정릉의 시신이 모두 불탔다는 결론을 내리고 남아 있는 유골로 국장을 다시 치르게 했다. 유골을 두 개의 종이 봉지로 수습했는데, 큰 봉지에는 뼈마디와 피부조각 등을 수습했고, 작은 봉지에는 타고 남은 재 등을 수습했다. 선조는 1593년 가을 불탄 유골을 가지고 성종과 중종의 국장을 다시 치렀다.
이러한 반인륜적인 도굴과 방화를 저지른 일본이 임진왜란 후 사죄와 배상도 없이 전쟁 운운하며 화친을 요구하자 국론은 둘로 갈렸다. 선조와 조정 중신들은 현실에 입각해 화친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반면, 젊은 관료들은 선왕의 복수를 주장하며 화친을 반대했다. 화친에 반대하는 쪽은 “임진왜란으로 우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고 심지어 선왕의 무덤까지 도굴되는 치욕을 당했으니 일본은 우리의 영원한 원수다.
와신상담해 이 치욕을 씻지는 못하더라도 관문을 닫아 걸고 일본과는 절대로 화친할 수 없다는 의리를 보여야 하는데 지금 화친하고자 하니 복수의 의리에 크게 어긋날까 염려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젊은 관원들의 대의명분이 아무리 훌륭하고 당당해도 전쟁 재발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 같은 현실과 명분 사이에서 선조는 최소한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와 도굴범 압송을 요구했던 것이다. 길고 긴 논쟁 끝에 1606년(선조 39년) 8월 선조는 화친(和親)의 전제조건 두 가지를 요구하는 사신을 대마도에 파견하였다. 일본에서는 바로 다음 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국서와 도굴범 2명을 보내왔다.
그런데 문제는 도굴범 2명의 진범 여부였다. 진범이 아니라면 억울한 사람을 죽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었다. 선조는 도굴범이 진범인지 아닌지를 엄중하게 조사하게 했다. 당시 조선 사람들 사이에는 대마도 출신의 평조윤이 도굴의 주범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평조윤이 이미 죽었다 하면서, 그 대신 평조윤과 함께 도굴에 참여했다는 대마도 사람 두 명을 체포해 압송했던 것이다. 하지만 평조윤의 조카로 알려진 한 사람을 조사한 결과 그는 “조선 땅은 이번이 처음으로 능침(陵寢)을 범한 일에 대해서는 전연 모르는 일이고, 평조윤이라고 하는 자도 모릅니다. 저에게는 부모형제도 없고 4∼5촌 이내의 친척도 없습니다.”라고 주장했다. 다른 한 사람 역시 한양에는 간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들이 도굴범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선조는 그들이 진범일 경우 죽인 후 종묘사직에 고하는 것으로 복수를 대신하려고 했지만, 조사 결과 두 명은 진범이 아닐 가능성이 훨씬 컸으므로 조정 신료들의 의견은 둘로 갈렸다. 첫째는 가짜 도굴범 두 명을 석방하고 화친 요구를 거절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가짜 도굴범을 보낸 것은 조선에 대한 기만행위이자 모욕행위이므로 단호히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도굴범이 비록 가짜라고 해도 대안이 없으니 그들을 죽이는 것으로 복수를 대신하고 화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