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군에게 파헤쳐진 왕릉 4편
■ 왜군에게 파헤쳐진 왕릉 4편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첫 번째 주장이나 현실을 중시하는 두 번째 주장이나 모두 일리가 있었다. 두 주장은 타협 없이 팽팽하게 맞서며 평행선을 달렸다. 그러자 선조는 이런 논리를 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 부모의 무덤을 도굴 당했다면, 수천 명의 도적 모두는 응당 그 아들이 직접 베어 살을 저며야 할 자들이다. 그러나 그 수천 명을 다 잡을 수 없게 됐고 다행히 한두 명을 잡았다면 아들 된 자는 실성해 미친 듯 뛰면서 부모의 묘에 가서 통곡하고 손수 죽여서 원수를 갚겠는가, 아니면 가만히 서서 냉소하면서 ‘이는 묘를 도굴한 괴수가 아니라 수종(隨從)한 적일 뿐이니 이들에 대해 노할 것이 없다’고 하겠는가? 만약 그렇게 하고서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의한 일이요 불효한 일이 아닐 수 없다.』《선조실록 39년 11월16일》
선조는 일본이 압송한 도굴범이 비록 진범이 아니라고 해도 일본인이라는 사실 자체로 도굴범이나 진배없으므로 처형하여 복수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던 것이다. 아울러 선조는 “한번 화친을 잃게 되면 사납게 무기를 들고 쳐들어와 우리 백성들이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을까 걱정되는 것은 물론 크게는 종묘사직의 안위에 관계되고 작게는 수십 년 동안 병란(兵亂)이 계속될 것이니 그 사이의 일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라며 현실론을 제기했다.
치열한 논쟁 끝에 1606년(선조 39년) 12월 선조는 도굴범 두 명을 공개적으로 사형시켰다. 비록 진짜 도굴범은 아니지만 일본인이기에 도굴범으로 간주돼 처형됐고, 이것으로 복수가 마무리된 것으로 여겨졌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는 진짜 복수가 아니라 가짜 복수였다.
어쨌든 복수를 마무리한 선조는 1607년(선조 40년) 1월 ‘회답겸쇄환사’라는 이름으로 정식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회답겸쇄환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에 회답하는 동시에 ‘조선의 포로를 국내로 송환하기 위해 파견하는 사절’이란 뜻이었다. 이 같은 사절단의 명칭으로 선조는 자신이 일본으로부터 최소한의 사죄와 배상을 받고 난 후 국교를 재개했다는 사실을 천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회답겸쇄환사 파견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조일(朝日) 양국 간에 평화가 성립되어 19세기 말까지 지속됐고, 9000여 명의 포로가 송환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측면에서는 비판받아야 할 부분도 많다. 우선 분명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지 못했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었다. 비록 9000명의 포로가 송환되기는 했지만 이를 20만의 전체 포로에 비춰보면 5%도 못 되는 숫자이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사죄와 배상만으로 화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면, 그 이후에 선조는 와신상담하며 치욕을 씻도록 더 노력해야 했다. 오히려 선조는 기울어가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외교 그리고 세자 광해군과의 권력투쟁에 몰두하다 세상을 떠났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다. 일제 36년간의 식민지배 역시 광복 이후 지금껏 청산되지 못한 역사로 남아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우리의 목소리를 일본은 외면하고 있다.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 것일까?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